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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절판돼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책 <영화 보기의 은밀한 매력/비디오드롬>은 박찬욱 감독이 서른한 살 때인 1994년에 낸 것이다. 아마 이 책은 감독 본인도 소장하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큰데 그건 그가 비교적 유명해지기 시작한 2005년, 그때 글을 모아 <박찬욱의 오마주>란 책으로 다시 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거나 몰랐을 법한 이야기 중 하나는 박찬욱이 글을 아주 잘 쓰는(썼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때 그는 남의 영화에 관해 글을 써서 먹고살았다. 그때의 글쓰기가 ‘먹고산다’에 해당할 만큼 수입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물질적으로 곤궁할 정도의 집안 내력은 아니나 오히려 그로 인해 정서적으로는 꽤 궁핍했다. 사업자당일대출 그래서였을까, 과거 그의 글은 상당히 냉소적이었다. 폐부를 찔렀다.
코엔 형제 감독이 만든 빼어난 갱스터 무비 ‘밀러스 크로싱’은 1990년 작품이지만 이에 관한 박찬욱의 글은 1993~1994년에 나왔다. 지나간 영화, 극장에서 종영된 영화를 쓰는 걸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읽어봐도 그가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모자에 대한 주식매각 여러 시퀀스를 설명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박찬욱은 코엔 형제 감독이 영화에서 모자를 남성 정장의 마무리 소품으로, 상승·돌출 이미지로, 남성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했다고 분석한다. 모자가 벗겨지는 일은 주인공 톰(가브리엘 번 분)에겐 최악의 상황이고 실제로 그는 영화에서 모자가 벗겨질 때마다 위기를 맞는다고 설명했다. 톰이 극 중 산업은행 지원동기 여인인 베나(마샤 게이 하든 분)와의 불륜 관계가 그의 아킬레스건이 되리라는 조짐은 그녀가 그와 키스하면서 벗겨 내던지는 모자에 의해 암시된다,고도 썼다. 코엔 형제 감독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지금은 세기의 영화감독이 된 박찬욱이 32년 전 자신들 영화를 이렇게 상세하게 분석했다는 것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대체로 특정 개인 한국신용평가 에 관한 판단은 그가 20대 말~30대 초에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들었으며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했는지, 무엇보다 그가 어떤 육체적·정신적 노동에 시달리며 살았는지를 추적하면 올바로 해낼 수 있다. 박찬욱은 이번에 만든 ‘어쩔수가없다’만으로는 어떤 인물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누군가가 ‘박찬욱론’을 쓰려 한다면 그가 1994년에서 2000년 사이 농협은행이자율 남의 영화에 관해 글을 써서 먹고살던 시절의 좌절과 우울을 들여다봐야 한다.
박찬욱은 1992년 데뷔작 ‘달은…해가 꾸는 꿈’을 제작해 처절한 실패를 겪었다. 지금은 없어진 서울 을지로 명보극장에서 개봉 첫날 일군의 20대 젊은이들이 양복을 갖춰 입고, 마치 조폭 기념행사처럼 줄지어 서 있던 장면이 생각난다. 박찬욱은 그때 장편영화 감독으로 빨리 데뷔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에 투자자와 제작자 배급업자를 잘못 만났다. 한번 잘못 끼운 단추는 두 번째 영화 ‘3인조’(1997)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 번째 작품으로 중국 상해를 오가며 야심 차게 준비한 ‘아나키스트’(2000)는 초반에 감독이 교체됐다.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나오지 않지만 록밴드 얘기를 다룬 ‘야간비행’이란 작품은 아예 크랭크인 첫날 중단되는 참사를 겪었다.
2000년 그에게 찾아온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과 행운은 박찬욱이 그렇게나 원하던 영화의 길은 아니었다. 그는 늘 자신‘만’의 영화,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이해하려 하지 않는 영화의 길을 가고 싶어 했다. 그때 박찬욱은 한국의 앨프리드 히치콕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면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1996) 같은 초현실주의 작품의 감독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작 그가 뜬 것은 다소 상투적인 상업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였다.
그래서 그는 종종 자신의 정신적 분열의 본질 같은 작품으로 회귀하곤 한다. 사람들의 논란을 샀던 이유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가 그랬다. 정신병동 남녀의 기이한 러브스토리를 지닌 작품이었다. 영화 후반부 두 주인공(임수정·정지훈 분)이 기관 소총을 난사하는 환상 장면은 이 영화가 지닌 그로테스크함의 압권이었다.
사람들은 박찬욱이 왜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20년 전 박찬욱은 정상과 비정상의 정신세계란 것, 미셸 푸코 말마따나 ‘감시와 처벌’ 사회가 만들어낸 시스템이란 걸 보여주되 그걸 코미디로 하면 쉬운 얘기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비교적 철저하게 외면받은 박찬욱 영화 가운데 수작은 ‘스토커’(2013)였다. 스토커라는 가문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극이다. 아빠인 리처드 스토커(더멋 멀로니 분)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딸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 분)와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먼 분) 그리고 삼촌 찰리 스토커(매슈 구드 분) 사이의 삼각 근친 치정 살인극이다.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나간다. 그 죽음들은 계속 은폐된다. 무엇보다 가족 간에 벌어지는 살인극이 끔찍하다.
박찬욱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모두 ‘억압’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억압받는 사람들(푸코식 정신병자들) 혹은 사회 시스템과 통제, 그리고 도덕률로 가로막힌 욕망으로 이상해진 사람들(스토커가의 사람들) 사이의 규범이야말로 박찬욱이 지향하는 인생관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결정판이 이번 신작 ‘어쩔수가없다’다. 박찬욱의 영혼은 중간계에 머물러 있다.
영화감독이라면 응당 자신이 만드는 영화 한 편 한 편만으로도 자신을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박찬욱 같은 다면성을 지닌 감독에게는 그가 그렇게 한들, 사람들로서는 ‘한 작품’만으로 ‘어떤 한 작품’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건 분명 박찬욱이 봉준호와 다른 지점과 궤도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봉준호는 ‘설국열차’처럼 수평적이거나 ‘기생충’처럼 수직적인, 그래서 대체로 직선의 미학을 지닌 감독이라면 박찬욱은 면과 면을 곡선으로 이어가는, 때로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감독이다. 둘은 매우 다르다. 박찬욱은 문학적이고 봉준호는 사회경제학적이다. 그러나 둘이 만나는 지점은 그럼에도 같다. 시대와 세상, 무엇보다 인간의 내심을 읽어 나가려는 목적성만큼은 같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박찬욱 영화가 현란한 것은 맞다. 그의 영화에는 종종 그가 즐겨 마신다는 카발란 위스키가 나오거나 그가 잠깐이나마 매료된 북구 작가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형사 시리즈 문고들이 스쳐 지나가듯 한 컷 훑으며 나온다(헤어질 결심). 이런 무심한 듯 심드렁한 한 컷 한 컷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알아보기 시작하면 굉장한 공감대의 끈이 이어지게 된다. 스티븐 소더버그가 제작한 ‘조지 클루니의 표적’(1998)에 관한 글을 쓰며 존 프랭컨하이머의 ‘52 픽업’, 아벨 페라라의 ‘캣 체이서’, 알랭 로브그리예 감독의 ‘블루 빌라’까지 얘기할 수 있는 감독은 아마도 박찬욱이 유일할 것이다. 그는 히치콕의 영화 제목처럼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다. 박찬욱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면 훈계는 물론이고 쓸데없는 과장이나 작위적인 반전도 포함된다. 물론 불필요한 칭송 따위도 딱 질색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다시, 이런 표현, 어쩔 수가 없다. 박찬욱은 우리 영화계 거장이자 마에스트로다. 그의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시대를 초월하는 문제가 됐다. 좋든 싫든 이제 박찬욱 영화에는 시대와 세상의 코드가 담겨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한 편이 인생의 모든 것, 감독의 전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창문으로 보기보다 직접 몸을 담글 때만 바다를 알 수 있는 법이라고 했다. 박찬욱의 바다는 실로 넓고도 깊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박찬욱 심층 인터뷰와 영화 세계, 그의 영화를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들, ‘라이카를 든 박찬욱 사진집’ 등은 아르떼 매거진 11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