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게임포커 ╉ 오션파라다이스게임하는법 ╉㎔ 0.ren587.top ╊[김삼웅 기자]
문단은 속성상 논쟁이 많은 분야에 속한다.
1960년대 문단의 대표적인 논쟁은 지식인의 참여론의 지평을 연 김수영과 이어령의 논쟁이 꼽힌다. 5.16 이후 오래 지속된 문단의 '침체기상태'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문인 김수영이 <사상계> 1968년 1월호에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발표하자 역시 문인인 이어령이 <조선일보> 1968년 2월 20일 '누가 그 조종(弔鐘)을 울리는가 - 오늘의 한국문화를 위협하는 것'이란 반론을 썼다.
직장인캐피탈대출▲ 김수영 흉상 문학관 내부에는 친필 원고 등 김수영 관련 자료가 많이 있다.
ⓒ 이양훈
김수영은 같은 신문 2월
2금융권대출 27일치에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 문예시평 '오늘의 한국문화를 위협하는 것'을 읽고'라 반박하고, 이어령은 같은 신문 3월 15일치에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 - 다시 김수영씨에게', 김수영은 다시 같은 지면 3월 26일치에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칙'을, 이어령이 다시 동지 3월 26일치에 '논리의 현장검증 똑똑히 해 보
행복한 직장 자 - 불온성 여부로 문학평가는 부당'이라는 글과 <사상계> 1968년 3월호에 '서랍 속에 든 '불온시'를 분석한다 -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읽고'를 발표했다.
이와 관련 문학평론가 김병걸은 "60년대 한국문단에서 벌어진 문학의 사회참여 시비는 김수영과 이어령의 대립적 논쟁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카드론 표명된 듯 하다."라 평가하고, "두 문인의 논전은 그후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대가 아니다'(이어령),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김수영), '논리의 현장검증 똑똑히 해 보자'(이어령) 등에서 예각적으로 대립을 계속하면서 불온성 및 오독의 시비로 방향이 바뀌면서 끝난 셈이다." (주석 1)고 정리했다.
신규창업자금 ▲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이어령 전장관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김철관
두 사람의 주장과 반론 일부를 소개한다.
사실은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최근에 써놓기만 하고, 발표를 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생각하며 고무를 받고 있다. 또한 신문사의 <신춘문예>의 응모작품 속에 끼어 있던 '불온한' 내용의 시도 생각이 난다. 나의 상식으로는 내 작품이나 '불온한' 그 응모작품이 아무 거리낌 없이 발표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현대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영광된 사회가 반드시 멀지 않아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는 것은 신문사의 응모에도 응해 오지 않는 보이지 않는 '불온한'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이 나의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볼 때 땅을 덮고 하늘을 덮을 만큼 많다. 그리고 그 안에 문호와 대시인의 씨앗이 숨어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위기는 아득한 미래의 70년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있다. - 김수영, '지식인의 사회참여'
문화를 정치 수단의 일부로 생각하고 문화적 가치를 곧 정치사회적인 이데올로기로 평가하는 오늘의 오도(誤導)된 사회 참여론자들이야말로 스스로 예술 본래 창조적 생명에 조종 (弔鐘)을 울리는 사람들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팥죽 한 그릇이 아쉬워 장자(長子)의 기업을 야곱에게 팔아 버린 '에서'와 같이 지금 우리의 일시적인 사회의 효용성을 추구하려다가 영원한 문예의 상속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팔아넘기는 어리석음을 경계하여야 된다. 문화를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문화인 자신의 문예관이 부당한 정치권력으로부터 받고 있는 그 문화의 위협보다도 몇 배나 더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 이어령, '누가 조종을 울리는가'
따라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두려워해야 할 '숨어 있는 걸 열자'는, 그가 말하는 '대중의 검열자'라기 보다도 획일주의가 강요하는 대제도의 유형무형의 문화기관의 에이전트들의 검열인 것이다.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대행하는 것이 이들이고, 이들의 검열제도가 바로 '대중의 검열자'를 자극하는 거대한 테에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의 검열자'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자각조차 할 수 없는... 숨어 있는' 검열자라고 <문예시평>자는 말하고 있지만, 대제도의 검열관 역시 그에 못지 않게 눈으로 볼 수 없는, 자각조차 할 수 없는 숨어 있는 것이다. 이들의 대명사가 바로 질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획일주의의 검열의 범죄와 '대중의 검열자'의 범죄의 비중을 가리자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니고, 이 두 개의 범죄를 동시에 공존시킴으로써, 여기에서 취해지는 밸런스를 현대문학의 창조적 출발점으로 인정할 수 없겠는가 하는 것이다. - 김수영,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불온하니까 그 작품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불온하니까 그 작품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만 그 주장과 판단이 다를 뿐, 문학작품을 문학작품으로 읽지 않으려는 태도에 있어선 서로 일치한다. 실상 이런 논평으로 따져 가면 가장 우수한 문학비평가는 가장 유능한 정부의 기관원이라는 이상한 모순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작품의 불온성 유무를 누구보다도 잘 민감하게 식별해 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관의 그 검열원'들이기 때문이다.
불온성을 작품의 가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김수영씨 같은 시인에게는 문학비평가의 월평보다 기관원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품명을 훔쳐보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한 일일 것이다. - 이어령,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
지금 말한 것처럼 이어령씨는 내가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온한 작품이라고 규정을 내리고 있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발표를 하면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서 발표는 못 하고 있지만 결코 불온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나의 자유의 고발의 한계는 이런 불온하지도 않은 작품을 불온하다고 오해를 받을까보아 무서워서 발표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따져 보자는 것이다.
이어령씨는 이에 대한 책임이 작가나 시인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아니 이들에게만 - 이들의 역량이 부족해서 - 있다고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장해 세력이 우선 대제도의 에이전트들의 획일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나는 지적했다. - 김수영,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김수영씨는 정치적으로 오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노파심 때문에 발표를 하지 못하고 있는 시가 있다고 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문학적 차원을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것을 정치적 차원으로 끌어내려 불온성 유무의 색안경으로 따지러 든다.
나의 시평은 그러한 비문학적 분위기를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공리적인 문학관을 가진 문학인들, 그리고 정치이념의 도구로 문학을 이용하려는 사이비 사회 참여론자, 어용 문인 등이 모두 그러한 문화인들이다.
그런데도 문학 논쟁을 하다가, 난데 없는 기관원 운운하는 사람과 이제 더 무엇을 논할 수 있겠는가? 김수영 씨의 건필을 빌 따름이다. - 이어령 '논리의 현장검증 똑똑히 해 보자'
주석
1> 김병걸, '60년대 참여론의 지평', 임헌영 편, <문학논쟁집>, 587쪽, 태극출판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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