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에 숨어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양양>은 ‘시대착오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이건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시대착오의 관습과 사고를 소재로 하는 다큐라는 것이다. 그 둘에는 큰 차이가 있다.
<양양>은 일종의 추적 다큐이다. 일인칭 시점 다큐인 이 작품은 내레이터, 화자가 감독 자신인 양주연이다. 양주연은 어느 날 우연히 자신에게 숨겨진 고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감독은 고모 양지영이 자살했고 그 과정에 석연치 않은 여러 비밀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감독은 그간 자신이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의 존재를 없던 것으로 하면서까지 조성된 위선적인 화목함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고모는 왜 자살했을까. 그걸 추적하면서 양주연은 이건 자살이 아니라 일종의 타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죽였을까. 그러나 누가 죽였다는 건 맞는 얘기일까. 가해자는 있는 것일까. 혹시 그 모든 게 가해자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탓에 다 은폐된 것은 아닐까.
초반에 다소 지루하게 이어지던 양주연의 가족사는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박진감 있게 이어진다.
78분의 짧은 다큐멘터리는 2부로 구성된다. 1부는 과거사를 쉬쉬하려는 가족의 자진 은폐와 침묵을 보여 준다. 양주연은 그 틈을 차분하게 뚫고 들어가려 애쓴다. 2부는 고모 양지영에게 대학 때 남자 친구가 있었음을 알게 되고 그가 스토킹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음을 고모 친구의 증언을 통해 밝혀낸다. 지영은 남자 친구의 집에서 음독자살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수사는 시작도 되지 못했다. 사회나 가족 양쪽 모두는 고모의 ‘죽음’을 ‘남자 잘못 만나 벌어진 일’일 뿐으로 치부하고 묻어 버린다. 딸이 남자 집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을 알리고 싶지 않은 아버지와 가
족들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사망 날짜조차 사건이 일어나기 몇 년 전으로 돌리려 시도했다. 감독 양주연은 이걸 한국의 가부장제가 빚은, 그래서 남성 중심 사회가 저지른, 그리하여 성평등의 역사가 올바로 세워지지 않았던 시대가 빚은 타살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한 평범한 가족의 내면에 숨어 있는 한국 젠더의 역사는 꽤 야만적이다. 영화 <양양>은 바로 그러한 얘
기이다.
영화 '양양' 스틸 컷. / 사진. ⓒ 서울독립영화제
양주연는 다큐 끝부분에 위대한 결과를 얻는다.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은 묘비에 이름을 넣지 않는다는 기이한 풍습, 악습을 일소해 낸다. 아버지를 설득(하는 과정은 나오지 않지만)해 가족묘에 고모의 유해를 합장시킨다. 그리고 묘비에 ‘드디어’ 이름 양지영(梁芝瑛)과 자신의 한글 이름 양주연을 새겨 넣을 수 있게 된다. 양씨는 제주 양씨이다. 제주도에는 고유의 성이 단 세 개인데 양씨, 고씨 그리고 부씨이다. 양주연의 양씨 가문은 오래전 제주에서 전라남도 광주로 이주해 온 것으로 보이며, 대대로 ‘제주 양씨 합동 제단’을 만들고 전통적으로 제를 지내 왔다. 양씨의 보수 성향, 남성 중심의 가족에 양주연은 고모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박아 넣음으로써 한국 사회 젠더들의 작은 성취를, 그러나 큰 의미의 성과를 이루어 낸다. 이때가 바로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양양인가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 의미가 사람들을 개안시키는 순간이다.
아마도 처음엔 이 영화가 강원도 양양을 향하는 힐링용 다큐멘터리일 것이라 짐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양양이 아니다. 이름이 지워진 채 그저 양양이라 처리되었던 한 여성의 잊혀진 이름을 찾아주는 이야기이며, 양씨 성을 지닌 두 여성이 어렵게 어렵게 만나고 이어졌다는 의미이다. 한국 사회는 아주 서서히 진화하고 있으며 그것은 여성의 주체가 이곳저곳에서 올바로 세워짐으로써 가능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영화 <양양>은 마치 수전 손택의 페미니즘을 부드러운 어감으로 읽고 듣고 배우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인터뷰어는 인터뷰이를 다그치지 않고 카메라는 피사체를 기다린다. 불안해하고 주저하면서 체념에 이르렀던 오랜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듯 현장음도 거르지 않는다. 양주연이 결정한 톤앤매너는 상당히 적확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다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감독이 자신의 어머니(최혜선)를 후반부에 다시 인터뷰하는 때에 나온다. 어머니는 고모의 죽음을 할아버지·할머니가 감춘 이유가 (민망한) 가정사를 남들에게 알리기 싫어서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양주연은 어머니에게 다시 묻는다. “내가 고모처럼 남자의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면 엄마는 어떨 것 같아?” 양주연의 엄마는 말을 하지 못한다. 양주연도 더는 캐묻지 않는다. 이때 양주연은 세 대의 카메라를 썼는데 하나는 엄마 원샷, 하나는 자기 것, 하나는 투 샷이다. 양주연은 이 침묵의 인터뷰에서 각각의 원샷을 길게 이어 붙였다. 그 무언의 공감이야말로 이 영화가 내세우는 외침 같은 것이다. 여성주의의 실현은 어쩌면 무언을 통한 무한한 공감이 우선돼야 하며 정작 거리의 샤우팅이나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공방은 후 순위일 수 있음을 느끼게 한다. 영화는 늘, 작은 우물에서 큰 바다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점층법의 예술이다. <양양>이야말로 그 진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 '양양' 스틸 컷. / 사진. ⓒ 서울독립영화제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알파벳 Y.A.N.G.을 깨알같이 반복적으로 이어 붙여서 고모의 얼굴을 그렸다. 인내심으로 기억을 발굴했고 공감으로 이름을 복구하며 초상화가 완성되었다. “이름이 되살아나는 순간 존재는 기억된다”라는 카피가 맞춤으로 어울린다.
영화 '양양' 포스터. /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매우 고답적인 주제의 작품일 수 있음에도 세련된 촬영과 편집이 이를 크게 변모시켰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는 속칭 ‘마가 많이 뜬다.’ 촬영과 촬영 사이에 간격을 많이 뒀다는 얘기다. 인터뷰는 때로 멈춰 침묵이 흐른다. 그래서 뜻밖의 묵음이 많다. 인터뷰 하나하나에도 정공법의 구도 감각이 잘 배어 있다. 하나도 허투루 찍은 장면이 없다. 영화 전공자답다. 양주연과 남편이자 프로듀서인 고두현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방송영상을 전공했다. 조명을 쓰는 법, 콘트라스트를 맞추는 법, 현장 음향의 적정한 사용 여부 등등 꼼꼼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방송 다큐 혹은 독립 다큐(의 구분은 사실상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방송용과 극장용을 나누기도 했다)의 교본과 같은 작품이다.
국내 극장 개봉관 사정은 너무 나쁘다. 개봉관, 스크린 수도 적고 관객들도 많이 찾지 않는다. 전국 14개 정도의 예술영화관 정도에 걸려 있다. 영화는 종종 ‘읽는’ 매체이다. 보지 못하고 또 결국엔 보게 되지 않더라도 <양양> 같은 영화가 있었고 ‘양양’이 강원도 양양이 아니라 양씨 여성(들)의 얘기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어도, 그 정도의 인지 능력만 있어도 국내의 여성주의 운동은 크게 확장될 것이다. 이 영화에서 페미니즘의 새로운 방향을 봤다. 온화주의이다. 양주연은 거리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고 고백한다. 한국의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세계 여성주의는 늘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으며 이중의 판단으로 인해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극 후반에 양주연은 또 하나의 위대한 선물을 얻는다. 그녀는 그 ‘선물’의 성장이 고모의 이름과 함께 시작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그것을 바란다. 다큐 <양양>은 작은 영화지만 큰 소망을 지닌 작품이다. 감독 양주연의 이후 작품을 기대한다.
제20회 파리한국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양양'. 감독 양주연은 이 영화제의 조명받는 신진 감독(포트레이트 섹션)으로 선정되었다. / 사진. ⓒ 양주연
파리한국영화제에서 영화 '양양' 상영 후 관객과 대화중인 양주연 감독. / 사진. ⓒ 양주연
오동진 영화평론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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