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반도체) 프로세서 회사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하고 싶습니다."
류수정 서울대학교 객원교수는 지난달 18일 서울대 관악캠퍼스 해동첨단공학관에서 아시아경제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류 교수는 지난해까지 국내 주력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인 사피온 코리아(현 리벨리온)를 이끌어온 반도체 분야 여성 리더다. 학계와 산업계를 오가며 차세대 반도체 연구뿐 아니라 국내 연관 사업과 시장을 키우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류 교수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공과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음에도 국내에 프로세서 분야의 시스템 반도체 유력 기업이 없다 보니 전공을 살려 일할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한국의 시스템 반도
해당상품 체 경쟁력을 높이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 일하겠다고 힘을 줘 말한 배경이다. 그는 전반적인 국내 산업 생태계를 확장하고 키우는 데에도 관심을 뒀다. 다음은 류 교수와의 일문일답.
류수정 서울대학교 객원교수(전 사피온 코리아 대표)가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해동첨단공학
대출연체자 관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반도체 분야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석사 때까지 데이터베이스(DB)를 공부했다. 전산과를 나와 이후 컴퓨터 엔지니어링으로 (전공을) 바꾼 사례다. 학부 4학년 때 DB 전공하는 교수님이 같이 공부하자고 제안해 주셔서 석사 공부를
수퍼박테리아살균제 하게 됐다. 당시 DB 관련 연구를 했지만 컴퓨터 아키텍처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후 미국으로 박사 유학을 가서 DB와 컴퓨터 아키텍처 분야 교수님을 모두 만나봤다. DB 분야 교수님은 워낙 유명하다 보니 뵙기가 어려웠다. 반면 지도교수님이 된 컴퓨터 아키텍처 분야 교수님은 3~4년 동안 학생을 받지 않다가 당시 받을 때가 돼 딱 시기가 맞았다. 조지아텍(
새마을금고 이율 조지아공과대)에서 컴퓨터 아키텍처 전공을 하게 된 배경이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미국에서는 6~7년 있었다. 가자마자 아이를 낳아서 (박사) 입학을 조금 연기한 뒤 들어갔다. 공부뿐 아니라 젊었을 때 많은 경험을 해볼 기회를 얻었다. 미국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시선, 시각이 있다는 것을 배웠고 큰 도움이
한국농협대학 됐다.
―국내로 돌아와서 삼성종합기술원(SAIT)에 입사했다. 여러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당시 국내에서 여러 군데 제안을 받아놓긴 했지만 SAIT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전에 삼성을 다녔기도 했고,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 회장이 1987년도에 매우 큰 비전을 갖고 SAIT를 만든 뒤 규모가 유지되고 있던 때였다. 이곳에서 전공인 프로세스 아키텍처를 계속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SAIT에서는 12년 정도 오래 있었다. 그곳에서 디지털신호처리장치(DSP)를 개발해서 설계자산(IP)으로 사업부에 기술을 이전, 핸드폰에 상용화하는 것을 처음 하면서 그 실적 기반으로 계속 일할 수 있었다. 이후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개발하게 됐다. 당시 회사 입장에서는 매우 큰 투자였다. 최종적으로 상용화하지는 못했지만 GPU가 중요해지던 시기에 사업화를 목표로 삼성전자의 시스템 반도체 개발 사업부인 시스템LSI사업부로 이동하게 됐다.
―GPU가 지금과 같은 관심을 받진 않았던 때지 않나.
▲지금이야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데이터센터 분야에서 GPU의 중요성이 급속도로 상승했지만, 당시는 모바일에서 GPU가 성능 바로미터가 되는 시점이었다. 애플이 자사 GPU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우리도 GPU를 개발하던 때였다. 당시 넥스트 GPU를 어떻게 둘 거냐 화두도 있다 보니 SAIT에서 신경망처리장치(NPU) 아키텍처 개발을 처음 시작하게 되면서 NPU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이후 사업부로 넘어가면서 엑시노스(삼성전자 AP)에 탑재하기 위해 GPU 개발을 담당했다.
―삼성전자를 떠난 뒤 서울대로 갔다가 다시 SK텔레콤으로 갔다. 배경은.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에 있으면서 삼성 뉴럴프로세싱리서치센터(NPRC) 관련 과제를 하고 있었다. 그때 NPU 관련 연구를 했다. 이후 정부 과제로 서버형 NPU를 개발하게 됐는데, 해당 개발을 SK텔레콤 주관으로 했다. SK텔레콤은 당시 서버형 NPU 사업에 대한 적임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때 오퍼를 받았고, 대기업에 들어가서 일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주도적으로 개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류수정 서울대학교 객원교수(전 사피온 코리아 대표)가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해동첨단공학관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SK텔레콤 자회사였던 사피온(AI 반도체 회사)에서는 대표로 있으면서 신제품을 출시하는 등 많은 역할을 했다. 어려움은 없었나.
대기업에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나와 보니 작은 회사더라도 모든 오퍼레이션이 갖춰져야 해서 어려움이 많았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서 쓰는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을 쓰려고 보니 너무 비싸더라. 그럼 나름대로 유사하게 시스템을 만들어서 써야 하는 것도 있고 해서, 하나의 회사로 커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조금 힘들었다. 투자자한테 약속한 로드맵을 지키면서 가야 하기에 신경 써야 할 부분들도 많았다.
그래도 SK텔레콤이 최상단에서 서비스하다 보니 실제 서비스를 바라보며 (제품을) 개발할 수 있어 좋았다. 실제 (NPU 개발 후) 스팸 필터링 대국민 서비스에 제품을 적용하는 등 활용이 가능하기도 했다. 반면 하드웨어 회사에 오래 다니다 보면 스펙을 먼저 만들게 된다. 어떤 게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숫자상 남들보다 좋아야 해서 가장 높은 스펙을 만들어야 하는 숙제가 있다. 이렇다 보니 만들고 난 뒤 유용하다며 껴맞추는 경우가 생긴다. 하드웨어 회사이기에 지니는 본질적인 문제다.
―프로세싱인메모리(PIM) 관련해서도 계속 연구한 건가.
▲서울대에서 국가 과제로 PIM 연구를 했고, SAIT에서도 했다. 사피온에 있을 때는 SK하이닉스와 협력해 PIM을 연구했다. 지금 학교에서도 PIM 관련해 계속 협력하기에 관심이 높기도 하고 계속 봐오고 있다.
―최근 관심사는.
▲우리 분야 톱 클래스 콘퍼런스가 10월에 열려서 워크숍을 개최하기로 했고, 이때 경진대회도 같이하려 한다. 지금 제일 관심을 두는 것 중 하나는 이종 컴퓨팅 엮는 것과 에코 시스템(생태계)을 구축하는 것이다. 과제가 'AI 벤치마킹(성능 평가) 툴'이다. 만들어진 하드웨어를 어떻게 평가할지 시나리오가 다 다를 수 있어서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관심이 많다. 제품이 나오더라도 평가가 잘 돼야 이걸 쓰려는 사람들이 믿고 사용할 수 있지 않나. 지금은 (제품을) 잘 아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 다들 개발 단계이다 보니 쓰기 어려워한다. 앞으로 6개 산업군을 정의해서 산업별로 활용할 수 있는 벤치마킹 시나리오를 만들어보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NPU가 여러 개 나왔는데, 활성화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도 필요할 것이다. 일단 이렇게 시작하고 편의성을 주는 방향으로 개발을 하려고 한다.
―NPU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긴 하지만 한국의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은 여전히 미약하다. 어떤 육성책이 필요할까.
▲세계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우리나라 비중이 3%도 안 된다. 최근 AI 반도체 등과 같이 국가적인 관심을 받으며 성장하는 분야도 있지만, 시스템 반도체의 다른 핵심 기술들도 존재하기에 이런 기반 기술이 될 만한 것을 지속해서 육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또 시스템 반도체 중 패키지나 후공정 분야는 우리나라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어 육성이 필요하다. 당장 업계 선두 분야가 아니더라도 정책을 일관적으로 추진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인력뿐 아니라 기업 육성도 과제다. 내가 국내에 들어올 때만 해도 프로세서를 개발하는 회사가 없어서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했다. 인력은 학교에서만 양성되지 않는다. 인력을 육성하는 산업이 있어야 하는데 미국에 집중돼 있어 인력들이 그쪽으로 집중되는 문제가 생기는 거다. (국내에서) 회사들이 많이 나와줘야 거기서 인력이 양성되고 이들이 또 새로운 회사를 차리면서 인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다양한 분야로 흩어져 있는 인재 육성 사업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도 필요할 것으로 본다.
류수정 서울대학교 객원교수(전 사피온 코리아 대표)가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해동첨단공학관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간 커리어를 이어가면서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었을 텐데.
▲엄마 찬스를 썼다. 부모님이 계시던 목천을 따라가서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그 당시 회사가 있던 기흥과 목천을 매일 출퇴근 했다. 이후 아이가 4학년 때 회사 근처로 올라온 뒤에는 힘들긴 했다. 남편과 날짜를 맞춰서 일주일 중에 누가 며칠을 집에 일찍 올지 정해서 아이를 챙겼다. 회사랑 집이 가까워서 일단 퇴근한 뒤 아이 밥을 먹이고 학원을 보낸 다음 다시 회사에 가서 새벽까지 일할 때도 있었다. 엔지니어링 분야가 시간이 많이 필요한 업무라 쉽지 않았지만 재밌어서 했다.
―커리어와 육아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성들이 많다.
▲가족의 서포트가 중요한 것 같다. 아이 수를 떠나 부모를 필요로 하다면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남의 손을 빌리는 것도 방법이다. 월급을 아이 키우는 데 다 써도 된다. 지금 일하는 것은 결국 본인에게 쌓이는 경력이고 전문성이다. 얻는 게 없는 게 아니라 다 본인에게 남는 것이다.
―중장기 목표가 있다면.
▲우리나라에 내로라하는 프로세서가 하나 있었으면 한다. 그런 프로세서 회사가 존재할 수 있도록 거기에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려고 한다. 그리고 AI 반도체 쪽에서 에코 시스템이 부족한 상황이라 (제품들을) 어떻게 엮어서 잘 쓸 수 있는지도 살피고 싶다. NPU를 썼을 때 더 좋은 경우도 있고, PIM을 썼을 때 시스템상에서 더 좋은 경우도 있어서 어떻게 쓸지 관점에서 AI 시스템이 확산하는 데 역할을 하고 싶다.
―후배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학교에서 보면 목표가 취업인 학생들이 꽤 많다. 학사만 하면 취업하기가 어려우니 석사를 마치고 가는 경우도 많다. 이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거기에 더해 좀 더 먼 관점에서 긴 목표를 가지라는 것이다. 먼 목표를 두면 사실 잘 안 보이는 것 같아도 일단 하나를 선정하면 내가 가는 길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다. 그리고 시도를 많이 해봤으면 좋겠다. 지금이 사실 가장 잃을 게 없을 때다. 안 가본 길에 기회가 있다.▶류수정 서울대 교수는 1971년생이다. 미국 조지아텍에서 전기·컴퓨터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로 돌아와 2004년 삼성종합기술원(현 SAIT)에 입사해 DSP, GPU 등 설계를 했다. 이후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에서 GPU 개발을 총괄하는 임원을 맡았다. 삼성 퇴사 후에는 서울대 전기전자공학부에서 객원·산학교수로 재직하며 NPU, PIM 등을 연구했다. 2021년에는 SK텔레콤에 합류했고 2022년 SK텔레콤에서 분사한 사피온 코리아 대표를 맡았다. 지금은 서울대 객원교수로서 차세대 반도체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세종=김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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