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젓가락으로 슬며시 눌러줄 때, 영화의 해피엔딩을 예감했다

[이용재의 필름위의 만찬] 영화 ‘모가디슈’와 깻잎장아찌아무래도 분위기가 영 어색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91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38년 동안 대치해 온 사이다. 해외에서라고 그 감정이 쉽게 누그러질 리 만무하다. 게다가 각국을 대표하는, 대사를 비롯한 외교관들이니 섣불리 행동할 수도 없다.그런데도 시국 탓에 더부살이를 하게 된 북한이니 더더욱 수저를 들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보다 못한 남한 대사 한신성(김윤석)이 북한 대사 림용수(허준호) 앞에 놓인 밥그릇을 자신의 것과 맞바꿔 먹기 시작한다. ‘자, 독극물 같은 건 넣지 않았소’라는 제스처랄까. 그제야 모두가 머뭇머뭇, 한술씩 뜨기 시작한다.영화 ‘모가디슈’ 식사 장면에 등장한 깻잎장아찌. /롯데엔터테인먼트‘모가디슈’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1991년은 남한이 유엔 가입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던 시기였다. 아프리카 특히 소말리아의 표를 얻기 위해 외교 활동을 벌였지만 부패가 만연해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북한이 공작을 벌여 서울에서 공수해 온 선물을 빼앗기는 일도 벌어진다.가뜩이나 과업도 어려운 판국에 소말리아에서 내전이 터지고, 대사관도 안전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남한 대사관은 달러로 회유한 경찰의 경비로 급한 불을 끄지만, 북측 사정은 다르다. 믿었던 현지 공작원들에게 강도를 당하고 몸만 간신히 빠져나온다. ‘큰 형님’ 격인 중국 대사관을 찾아가지만 역시 약탈당했음을 발견하고 결국 남한 대사관 앞까지 온다.림용수 대사는 아이들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분단의 현실 탓에 남측도 손을 선뜻 내밀기가 어렵다. 자칫 잘못하면 엄청난 파장을 미칠 일 아닌가. 하지만 일촉즉발인 내전 상황, 남한 대사관은 문을 열고 북의 대사와 직원, 가족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어렵게 차린 식탁에 모두가 모여 앉는다.‘모가디슈’의 식사 장면은 여러모로 단연 최고다. 일단 영화가 딱 꺾이는 시점, 남북한이 공생을 위해 협력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의 정점에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가 누그러뜨리는 데 활용된다. 연출도 훌륭하다. 내전과 남북한의 대치 현실이 맞물려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 정적 속에서 조심스럽게 아삭한 채소를 씹는 소리만 방에 울려 퍼진다. 한식의 붙박이 반찬인 김치는 생채소를 절여 만들다 보니 특유의 씹는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를 적극 활용해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배를 채우며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모습을 묘사했다.그 정점에서 깻잎장아찌가 등장한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깻잎장아찌는 만들고 나면 숨이 죽어 이파리가 들러붙는다. 혼자서라면 손으로 떼어 먹기도 하지만, 여럿이 함께인 식탁에서는 상부상조 정신을 발휘해 젓가락으로 눌러줘야 편하게 한 장씩 먹을 수 있다. 남측 대사 부인 김명희(김소진)가 혼자서 깻잎을 가지고 씨름하자 북측 대사 부인 배명숙(박명신)이 무심한 듯 젓가락으로 눌러 주는 장면에서, 우리는 남북이 합심해 탈출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겠노라 낙관하게 된다.영화 '모가디슈'에서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식사하는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여러 의미를 충실히 담은 식사 장면에 훈훈함을 보태자면, 당시 남북 대사관의 관계는 원래 좋았다고 한다. 영화와 달리 양측은 내전 발발 이후 탈출을 타진하려고 나간 공항에서 처음 접촉했고, 영화 속 한신성 대사의 실제 모델인 강신성 주(駐)소말리아 대사가 김용수 북한 대사에게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탈출까지 3박 4일 함께 머무는 동안 분위기도 좋았고, 북측에서는 땅에 묻어 두었던 쌀과 식량을 가져왔고 김치도 담가 주었다고 한다.남북한은 소말리아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을 통해 구조기를 타고 케냐로 탈출했다. 물론 이후로는 남북한이 각자의 길을 갔지만, 모가디슈의 무사 탈출이라는 해피엔딩을 목도하며 깻잎이 먹고 싶어지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간첩’이다. 직접 만들어도 좋지만 우리에겐 1976년부터 만들었다는, 거의 고전 반열에 올라선 통조림 깻잎이 있다. 상표도 굳이 들먹일 필요 없는 제품으로 70g 최저가 135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