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路] 대통령의 난(蘭)

지난해 6월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양기대 의원실에 문재인 대통령의 축하난이 놓여져 있다. 문 대통령은 21대 국회 임기를 시작한 여야 국회의원 300명 전원에게 축하 난을 보냈다. 2020.6.2/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서울=뉴스1) 조소영 기자 = 승진을 하거나 영전한 사람에게 우리는 통상적으로 난(蘭)을 보낸다. '난 선물'은 선물을 받은 사람이 신분 상승으로 인해 혹시 맞닥뜨릴 수 있는 부정적인 일들은 쳐내고 맡은 직위는 묵묵히 이행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라고 한다. 사군자 중 하나인 난은 고고함을 상징한다.대통령의 난은 조금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말 그대로 '청와대의 난'이라는 점에서다. 대통령이 선물로 보내는 난은 시중의 화원이나 꽃집에서 구매된 것이 아니라 청와대 온실에서 직접 재배된 것이다. 예산도 아끼고 의미도 더한 청와대의 '기른 난 선물하기'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시작됐고 현 문재인 정부에서도 유지되고 있다.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위해 준비한 축하 난이 오는 15일에는 전달될 것으로 보인다. 윤 후보가 지난 5일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지 열흘 만이다. 10일 윤 후보 측 관계자는 뉴스1에 "청와대(이철희 정무수석)가 15일 오후 2시쯤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윤 후보에게) 축하 난을 전달하는 일정을 조율 중에 있다"고 밝혔다.청와대의 난 전달은 역대 현직 대통령의 야당 후보에 대한 난 선물 시기와 비교했을 때 다소 늦은 감이 있다.2012년 이명박 대통령은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선출(2012년 9월16일)된 당일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 명의로 축하 메시지를 냈다. 뒤이어 나흘 만인 9월20일 이달곤 정무수석이 문 후보 의원실을 예방해 축하 난을 전달했다.1997년 김영삼 대통령도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확정(1997년 5월19일)된 다음날(5월20일) 김 후보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 인사를 전했다. 이와 함께 같은 날 강인섭 정무수석을 김 후보의 일산 자택으로 보내 난을 선물했다.다만 현 상황을 청와대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문 대통령의 난은 당초 지난 8일 윤 후보에게 전달될 예정이었다. 청와대는 '축하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게 이번 주 중에는 난을 전달하겠다'는 입장이었다.하지만 윤 후보 측이 바쁜 일정을 이유로 일자 조정을 요청하면서 만남이 순연됐다. 윤 후보는 전날(10일)부터는 1박2일간 광주 5·18민주묘지와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고(故) 노무현 대통령 묘역을 찾는 일정에 들어갔다.청와대는 윤 후보를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입장이다. 윤 후보의 대선 후보 선출을 축하하는 자리를 잡는 것인데다, 대선 후보 일정이 얼마나 빡빡한지 알고 있는 만큼 윤 후보가 편한 날로 일자 조율을 하겠다는 것이다.청와대는 또 다른 야당 후보들인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에게도 축하 난을 전달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만나는 후보는 제1야당 후보인 윤 후보를 첫손에 꼽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7월25일 오전 청와대에서 당시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환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2019.7.25/뉴스1다만 문 대통령과 윤 후보의 인연이 인연인 만큼 청와대 일각에선 불편한 기색도 감지된다. 문 대통령은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과 동시에 윤 후보를 서울중앙지검장으로 기용했고 이후에는 검찰총장으로 발탁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2019년 7월 검찰총장 임명장 수여식 당시 윤 총장을 "우리 윤 총장"이라고 칭했었다.하지만 지금의 윤 후보는 '반문(反문재인)의 선봉'에 서있다. 이런 연유로 한편에서는 지난 8일 만남이 불발된 것을 두고 검찰총장 재직 시절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웠던 윤 후보가 청와대 측을 피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청와대 핵심관계자는 9일 기자들이 '(이철희 수석과 윤 후보가) 8일 만남을 가지려다가 못 만난 게 아니냐'고 묻자 "후보 측에서 일정 재조정을 요청했고 서로 일정이 안 맞은 것은 아니었다"고 확대해석에 선을 그었지만 묘한 기류는 이어지는 분위기다.정치권에선 임기 말 30~40%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살아있는 권력'에 윤 후보 측도 견제구를 날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20대 대선 100일을 일주일 여 앞둔 오는 21일 '국민과의 대화' 일정까지 잡아둔 상태다.이런 가운데 문 대통령은 지난달 10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때와 달리 윤 후보 선출에 대해 지금까지 별도 축하 메시지를 내지 않은 상황이다.청와대는 이 후보의 경우, 문 대통령이 '당원 자격'으로 축하한다는 것이 전제됐던 만큼 상황에 차이가 있다는 입장이지만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의 윤 후보에 대한 불편함과 서운함이 에둘러 표현된 게 아니냐는 풀이도 나온다.단 이철희 수석이 15일 윤 후보에게 난을 전달하면서 비공개 환담을 가지게 되면 그때 문 대통령의 메시지가 전달될 가능성도 있다.이상민 민주당 의원은 9일 CBS 라디오 '한판승부'에 출연해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총장까지 했던 인사가 야당 대선 후보까지 되니 "속마음은 쓰리다"면서 "(그럼에도) 이렇게 비유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떠난 여인이 나중에 청첩장을 보냈을 때 축의금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고) 축의금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한편 난을 둘러싼 대표적인 해프닝 중 하나는 2016년 2월 박근혜 정부 당시 벌어진 '난 거부 사건'을 꼽을 수 있다.2월2일 64번째 생일을 맞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김종인 당시 더민주(현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자신의 비서실장이었던 박수현 의원(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을 통해 생일 선물로 난 화분을 보냈으나 청와대 정무수석실이 세 번에 걸쳐 사양을 하면서 박 의원은 난을 배달하지 못했다.당시 현기환 정무수석은 여야 간 처리합의된 법안조차 통과되지 않는 상황에서 축하 난을 주고받는 게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사양의 뜻을 전한 것으로 전해졌다.하지만 국무회의를 마치고 이 일을 뒤늦게 보고받은 박 대통령은 정무수석실을 크게 질책한 뒤 난을 수령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박 의원과 김성수 대변인이 청와대로 직접 찾아가 난을 전달했고 이로써 박 대통령의 생일 난 해프닝이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