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음식연구원 50주년‘선일당’ 연 한복려 원장한식을 세계에 알린 일등 공신 ‘대장금’을 이야기할 때 이영애만큼 자주 언급되는 이가 궁중음식연구원 한복려(74) 원장이다. 궁중 음식 기능 보유자인 한 원장은 대장금 자문을 맡아 음식 고증은 물론 배우들에게 칼질까지 가르쳤다. 2000년 평양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 주최 만찬 총괄,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담 만찬,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국가 만찬 등 한식 세계화의 중요한 순간마다 그가 있었다.궁중음식연구원에서 만난 한복려 원장은 “궁중 음식을 이어야겠다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돕다 보니 벌써 50년이 됐다”고 했다./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지난 15일은 어머니 고(故) 황혜성 선생에 이어 한 원장이 이끌어온 궁중음식연구원이 50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한 원장은 “어머니가 스승이신 한희순 상궁을 모시는 마음에서 스승의 날인 5월 15일로 연구원 개원을 잡았다고 알고 있다”고 했다. 한 원장을 서울 원서동 골목 끝자락에 있는 궁중음식연구원에서 만났다.-50년 전 1971년 5월 15일이 기억 나세요?“그럼요. 그해 1월 한희순 상궁께서 무형문화재 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1대 기능 보유자로 지정받으셨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동대문 앞에 있던 버스 터미널 그 큰 건물 4층 전체를 덜커덕 계약하셨고, 5월 15일 궁중 음식 전시를 여셨어요. 장안에 한다 하는 사람들은 다 왔던 것 같아요. 외국 손님들도 많이 왔고요. 저는 막 결혼해 첫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죠.”-언제 이곳에 정착했나요?“동대문 버스 터미널 건물에 한동안 있다가 이쪽저쪽 옮겨 다녔는데, 어머니가 연세 드시면서 남의 집 돌아다니며 하는 건 아닌 것 같았어요. 고민하던 중에 마침 아는 분이 ‘내 집 사요’ 했는데 그게 여기예요. 조금 뒤 옆집도 나오면서 지금 규모가 됐지요. 누가 이 구석까지 음식을 배우러 오겠느냐, 장사가 되겠느냐 걱정하는 말들이 많았는데, 재미난 게, 우리 연구원에서 결혼 폐백·이바지 음식 가르치는 ‘혼례반’을 개설한다는 기사가 아주 작게 조선일보에 나갔어요. 그걸 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들 오던지. 그때가 IMF였잖아요. 여자들이 뭐라도 돈벌이를 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할 때였죠. 폐백과 이바지 배우겠다는 이들이 하도 몰려서 일주일에 세 반씩 수업했어요. 덕분에 집 사서 고치느라 우리 세 자매가 대출 받았던 빚을 다 갚았고요(웃음).”궁중음식연구원을 세운 황혜성은 고등학교 때부터 일본에서 유학한 신여성이었다. 교토여자전문학교 가정과를 졸업하고 1940년 귀국해 숙명여전(현 숙명여대)에서 교편을 잡은 황 선생에게 일본인 교장은 “조선 요리를 가르쳐보라”고 했다. 조선 전통 음식을 배우러 찾아간 곳이 창덕궁 낙선재. 그곳에서 순종 계비 순정효황후를 모시던 한희순 주방 상궁을 스승으로 모시며 궁중 음식을 30년간 전수받았다. 조리법을 기록했고 재료를 계량화하는 등 궁중 음식을 체계화했다.황 선생은 세 딸에게도 궁중 요리를 전수했다. 첫째가 한복려 원장이고, 둘째가 요리연구가 한복선, 셋째가 한복진 교수다.-대학 때 전공은 의외로 원예였네요?“전기 대학에 떨어져서 그렇게 됐어요(웃음). 당시 어머니와 친한 원예과 교수님이 ‘우리 학과 좋다’고 해서 갔지요. 가보니 원예라는 게 농사 짓는거라서 음식과 관련이 좀 있더라고요(웃음).”-궁중 음식을 해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건 없었나요?“어머니 일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어머니가) 무형문화재 지정받으려면 전수생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하겠어요. 어머니가 딸인 저, 그리고 대학 제자인 정길자(현 궁중병과연구원장) 등등에게 시켜서 할 수 없이 하게 됐죠(웃음).”-그런데 궁중 음식의 대가가 되지 않았나요.“제가 본격적으로 음식을 한 건 1981년부터예요. 1979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 제가 생활 전선에 나서야 했어요. 어머니가 일본으로 가서 요리 공부를 하라고 하셨어요. 오사카 쓰지 요리학교에서 배우고 돌아와 요리학원을 차렸고, 당시 쏟아져 나오던 잡지 요리 코너며 요리책 등을 맡아서 하면서 요리연구가란 타이틀이 생긴 거예요. 그러다 어머니를 도울 사람이 없으니까 제가 잇게 된 거죠.”-어릴 때부터 집에서 궁중 음식을 만들고 먹고 자라셨을 것 같은데요.“어머니는 대학에서만 궁중 음식을 가르쳤지, 집에서 음식을 가르치진 않았어요. 저희 아버지가 일찌감치 시골로 내려가셨는데, 그것도 소설 같은 이야기라…. 실은 오빠가 산에서 사고로 죽었어요. 아버지는 경기고 다니던 아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고향에 내려가 묘지기처럼 아들 곁을 지키셨죠. 그러니 어머니가 생활비를 벌어야 했어요. 바쁘시니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은 오므라이스나 돈가스(웃음). 궁중 음식은 학문·연구로서 하신 거예요.”-남들은 세 자매를 ‘어머니 덕에 궁중 음식 기능 보유자·요리연구가·교수가 된 금수저’들로 보기도 합니다.“하긴 음식 쪽 재능을 물려받은 것만 해도 금수저라고 해야겠죠(웃음). 우리 세 자매도 ‘어머니가 재능을 골고루 물려주셔서 이제껏 잘살고 있다’고 얘기해요.”-어머니가 딸 칭찬에 인색하셨다고요.“어머니는 자랑을 안 하셨어요. 남들 앞에서 기껏 칭찬한 게 ‘쟤도 잘해요’였지요. ‘딴 사람도 잘하지만 우리 딸도 잘해요’ 이 정도? 워낙 제자들이 많으니 자기 딸을 칭찬하기는 힘들었겠죠. 지금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어머니와 얕고 가까운 정을 나누지는 않았어요. 저도 무뚝뚝하고요.”-쿨(cool)한 관계셨나 봐요.“쿨했죠. 나도 어머니처럼 너무 쿨하게 자식을 대하고 있지는 않나 조금 걱정되긴 해요(웃음).”-‘지화자’ ‘궁연’ 등 한식당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모두 문을 닫았죠?“식당 자문에 응하거나 메뉴 짜는 건 무지 많이 했는데, 경영은 제 전문이 아니더라고요. 손님이 돈을 내려고 하면 쑥스러워서 도망갔어요.”-궁중 음식이 맛은 없다는 말들도 있습니다.“요즘 입맛으로 보면 궁중 음식은 자극적이지 않고 무덤덤해요. 전국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이 워낙 많다 보니 예로부터 맛의 조화를 이루는 게 중요했어요.”궁중음식연구원이 있는 원서동은 평소 서울 한복판이라 믿기 힘들 만큼 조용한 주택가이지만, 기자가 찾아간 날은 연구원 맞은편 한옥 신축 공사로 시끌벅적했다. 한 원장은 “선일당(膳逸堂) 건축이 마무리 단계”라고 했다. ‘뛰어난(逸) 음식(膳)이 있는 집(堂)’이라는 의미인 선일당은 본래 한 원장의 호(號). 그는 “궁중 음식을 비롯해 한식 전반을 연구하고 콘텐츠화하기 위한 작은 공간”이라며 “50년 동안 쌓아온 한식 연구가 후대로 이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마련하게 됐다”고 했다.궁중음식연구원 개원 50주년에 맞춰 ‘음식고전책 시리즈’로 출간된 ‘음식절조’, ‘봉접요람’, ‘계미서’./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10평쯤 되는 땅에 들어선 선일당은 지상과 지하 2개 층으로 된 구조가 일반 한옥과 다르다. 지상에서는 연구자들이 모여 한식을 공부하거나, 고(古)조리서를 읽고 활용할 수 있도록 옛 한글과 한자로 된 내용을 현대 한글로 번역해 책으로 출간하는 등의 작업이 이뤄진다. 연구원 50주년과 선일당 오픈에 맞춰 1500년대 ‘계미서(癸未書)’와 1800년대 ‘음식절조(飮食節造)’ ‘봉접요람(捧接要覽)’이 최근 출간됐다. 지하는 영상 스튜디오다. 한 원장은 “모든 콘텐츠가 영상으로 가는 추세에 맞추기 위해서”라고 했다.-앞으로 궁중 음식 그리고 궁중음식연구원은 누가 이어가나요.“확실하게 하겠다는 사람도 없지만 함부로 하겠다고 나설 수도 없어요.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는 자식이라고 무조건 잇는 게 아니라 시험을 거쳐 능력이 있는지 보고 선정하는 거예요. 게다가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처럼 전수받은 한 사람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되죠. 누구라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어요. 궁중음식연구원을 4년 전 사단법인에서 문화재청 소속 공익재단으로 바꾸고, 이번에 선일당을 만든 건 그런 이유에서예요. 여기까지가 내가 마무리해야 할 일이었어요. 앞으로는 누구든 후대에서 이어서 발전시켜 나가겠죠.”-궁중 음식 무형문화재의 ‘소울 푸드'는 뭘까 궁금합니다.“아유, 바빠서 그냥 있는 대로 먹어요. 샐러드도 먹고, 마땅한 게 없으면 라면도 끓여 먹고요. 하하!”[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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