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이 정년연장 입법을 추진하는 가운데 대기업 일부에선 산업·직군별 특성에 맞는 ‘자율 해법’을 찾아 실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철강업계는 재고용으로 기술 전승을, 자동차업계는 계속 고용으로 생산 안정을 찾았다. 또 반도체업계는 ‘정년 없는 인재’로 연구개발(R&D) 경쟁력을 지키고 있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기업 규모·직군·산업별로 해법이 다른 만큼 일률적 입법보다 기업 자율로 맞춤형 제도를 도입하도록 인센티브 등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10일 재계에 따르면 포스코, 현대자동차, SK하이닉스,
삼성 등 국내 주요 대기업은 법적 강제 없이도 재고용·계속고용 제도를 통해 숙련 인력을 유지하면서 청년 채용도 병행하는 균형점을 찾아 실천하고 있다.
포스코 [사진=연합뉴스]
먼저 포스코는 정
년 이후 자발적 재고용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기업으로 꼽힌다. 2011년 정년을 56세에서 58세로 연장하면서 임금피크제와 함께 재고용 제도를 처음 도입했다. 당시 58세 퇴직 후 2년간 재고용을 거쳐 사실상 60세까지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10년 넘게 제도를 운영하며 노하우를 축적한 포스코는 2024년
임금·단체협약(임단협)을 통해 ‘고용연장형 제도’를 대폭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기존에는 일부 우수 인력만 선별적으로 재고용했지만 이제는 정년퇴직자의 70% 수준까지 재채용 범위를 넓혔다. 정년퇴직 후 1년 단위 계약직으로 재고용하며 필요에 따라 최대 2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처우는 연 5700만~6000만원으로 정년 전 급여보다는 낮
지만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한다. 포스코 관계자는 “장기간 축적된 전문 기술과 현장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동시에 퇴직자들에게는 경력을 이어갈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동국제강 인천공장에서 열린 동국제강 임금 및 단체협약 조인식에서 최삼영 사장(가운데 오
른쪽)과 박상규 노조위원장(가운데 왼쪽)이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이날 동국제강은 임금 인상 및 정년 연장(61세→62세) 등 단체협약에 합의했다. [동국제강]
동국제강은 노사 합의로 아예 정년 자체를 연장하는 방식을 택했다. 2022년 60세에서 61세로, 2024년에는 다시 62세로 1년씩 연장했다. 앞서 동국제강은 “숙련 인력이 더 필요한 사측과 좀 더 오래 일하고 싶어하는 노조 의견에 노사 모두 공감해 정년 연장이란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말했다.
베이비붐 세대 은퇴와 구인난 대응, 고숙련 인력 부족 해소가 목적이다. 경쟁사인 포스코·현대제철 정년이 60세인 점을 고려하면 업계에서 드문 사례다.
[사진=연합뉴스]
현대차는 노사 합의를 통해 퇴직 후 재고용 제도를 확대해 고용 안정성을 높여 나가고 있다. 그간 현대차 노조는 지속해서 정년 연장을 요구해왔고, 사측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대치하던 양측 갈등을 풀어준 게 퇴직 후 재고용 프로그램인 ‘숙련 재고용 제도’다. 퇴직 후에도 근로자가 원하면 최대 2년간 현장에서 계약직 형태로 일할 수 있게 하는 게 핵심이다. 정년 연장에 비해 청년층 고용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대안으로 손꼽히며 점차 생산직에서 판매·기술직군으로 제도가 확대되고 있다.
현대차 노사는 2019년 첫 제도 도입에 합의했고 지난해 재고용 기간을 1년에서 최대 2년으로 연장하며 고용을 강화하고 있다. 기아,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현대로템 등 주력 계열사들 역시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재고용 프로그램은 기본급은 계약직 초봉 수준이지만 성과급까지 받을 수 있다”며 “퇴직자의 90%가량이 선택할 정도로 선호도가 높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 이천 본사 [사진=연합뉴스]
SK하이닉스는 ‘정년 없는 인재’ 제도로 전문가 활용에 앞장서고 있다. 2018년 도입한 기술 전문가(HE) 제도는 우수 엔지니어가 정년 이후에도 계속 근무하며 기술력을 발휘하고 후배를 육성하도록 설계됐다. 2020년 1호 전문가를 시작으로 현재 4명이 활동하고 있다.
생산 현장에서도 2017년부터 명장 제도를 운영하고 2022년에는 명장 중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은 인력을 정년 없이 활동하는 ‘마스터’로 선발하는 제도를 신설했다.
퇴직 임원들이 사내 대학 SKHU 전문교수로 활동하며 후배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제도도 있다. 현재 24명이 강의, 프로젝트 자문, 연구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연합뉴스]
삼성전자도 퇴직한 전문인력을 활용하는 ‘시니어트랙’ 제도를 운용 중이다. ‘삼성 명장’ 직원들이 정년 이후 심사를 거쳐 우선 선발되며 매년 10명 이상을 뽑는다.
삼성 명장은 한 분야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장인 수준의 숙련도와 노하우를 갖춘 최고 전문가를 인증하는 제도다. 올해 2월 임단협에서는 3자녀 이상 직원을 정년 후 재고용하는 것도 제도화하기로 했다.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HD현대중공업]
이외에 HD현대 조선 계열사들도 생산기술직의 경우 정년 후 계약직으로 최대 2년 고용하는 제도를 운영한다. 1년 계약 후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1년 더 연장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대기업들이 자율적으로 해법을 찾는 배경에는 일률적 법제화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마다 업종 특성, 인력 구조, 재무 상황이 다른데 법으로 정년을 일괄 연장하면 청년 채용 감소, 인건비 부담 등 부작용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철강업체는 고숙련 인력 유지가, 자동차업체는 생산 공백 방지가, 반도체업체는 기술 전승이 핵심이다. 각 기업이 처한 경영 환경과 인력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산업 구조에 맞는 민간 주도의 다양한 해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실제 일본은 2013년 계속고용 제도를 의무화하면서 기업이 정년 연장, 정년 폐지, 재고용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자율성을 보장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마다 업종 특성과 인력 구조가 다른데 법으로 일괄 연장하면 청년 채용이 줄 수밖에 없다”며 “퇴직 후 재계약 방식으로 하면 기업이 개인 성과를 보며 선택적으로 재고용할 수 있어 부담이 덜하고 청년 고용에도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산업계 충격을 줄이기 위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재계·노동 분야 전문가는 “선도 기업들이 이미 재고용 제도로 해법을 찾았고 중소기업도 인력 부족으로 자연스럽게 60세 이상 고용이 늘고 있다”며 “정부는 일률적 입법보다 인센티브로 기업의 자율적 해법을 유도하고 일본처럼 단계적 제도 정착을 위한 과도기를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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