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 기자]
이재명 정부가 간첩죄의 적용 대상을 '적국'에서 '외국'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자나 깨나 간첩 조심'을 외치며 반공방첩을 귀가 따갑도록 강조했던 나라다. 하지만 실상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진행되는 움직임은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대한민국의 국가기밀을 노리는 이들의 국적은 다양하다. 인공기 하나만 펄럭이는 게 아니라, 만국기 속의 여러 국기들이 함께 펄럭이고 있다. 하지만, 간첩죄를 다루는 형법 제98조는 "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 "군사상의 기밀을 적국에 누설한 자"에 대해서만 규정한
릴게임한국 다.
대한민국은 북한 하나만을 적국으로 대해왔다. 그래서 제3국인들은 군사기밀보호법이나 '산업기술 유출 방지·보호법' 등의 위반자가 될 수는 있어도 위 98조에 해당하는 간첩이 되지는 않는다. 1953년 10월 3일 형법 시행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점은 바뀌지 않았다. 1953년에 등장한 위 조문은 현행 형법 제98조와 똑같다.
바다이야기온라인 반이승만세력 제거 위해 '간첩죄' 악용했다
▲ 대한민국역사
릴게임야마토 박물관에 전시된 과거의 '간첩 식별법' 포스터
ⓒ 연합뉴스
간첩죄를 적국을 위한 행위로만 한정하는 국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에서 한국 하나다. 북한과의 관련성만
바다이야기사이트 없으면 한국에서는 간첩죄로 처벌되지 않는다.
이렇게 된 데는 정부수립 이후의 정치 상황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승만 정권은 외부로 눈 돌릴 겨를이 별로 없었다. 친일세력이 정권의 중추를 이루고 있어 정통성이 극히 취약했다. 그래서 친일세력을 비토하는 '반국가세력'을 상대하기에도 바빴다. 한국전쟁 초기에 이승만 정권이
야마토게임하기 남쪽으로 도주하기에 바빴던 원인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의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수만 명 내지 20만 명 정도의 반이승만세력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국민보도연맹 사건). 그들에게는 북한만큼이나 반대세력도 두려운 존재였다.
북한 정권과 반이승만세력은 서로 다른 진영이지만, 이승만 정권은 둘을 한 데 엮어 빨갱이로 규정했다. 조봉암 사건에서 나타났듯이, 반대세력을 북한 간첩으로 몰아세우는 간첩조작이 이 시대에 횡행했다. 형법상의 간첩죄는 '북에서 보낸 스파이'와 '북과 무관한 반이승만세력'을 동일 부류로 취급하는 데도 활용됐다.
간첩죄 규정이 그렇게 운영됐다는 점은 1959년 5월 1일 내무부·국방부·법무부 실무자 회의에서 재확인된 간첩의 정의에서도 확인된다. 다음날 <동아일보> 3면에 따르면, 당시 정권은 "북한 괴뢰집단에서 남파된 대남공작대원"과 더불어 "국가보안법 위반자"도 간첩에 포함시켰다. 독립운동가와 진보주의자들이 다수 포함된 보안법 위반자도 북한 간첩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북한이 소련·중국의 지원하에 한국전쟁을 일으킨 뒤 형법이 제정되고 간첩죄가 신설됐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국에는 북한의 우방인 소련과 중국도 포함됐다. 위 실무자 회의에서는 "일본 조총련 관계자와 중공·소련 등 적성국가로부터 침투한 간첩"도 간첩죄 적용 대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북한 및 조총련과 반이승만세력이 간첩죄의 주된 규율 대상이었다. 정권에 실질적 위협이 되는 세력만 적국으로 규정한 것이다. 간첩죄 조항이 국가기밀을 보호할 목적보다는 정권을 지킬 목적으로 활용됐던 것이다. 진정으로 국가기밀을 보호할 생각이 있었다면, 북한 이외의 국가들을 위한 간첩까지도 처벌할 수 있도록 형법 제98조를 다듬었을 것이다.
일본군이 동학군 진압을 빌미로 경복궁을 점령한 1894년 이후로 한국인들의 마음속에는 일본도 적국으로 자리 잡았다. 이 관념은 해방 뒤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에 의한 제약을 받았다.
1945년에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이 나라를 전범국이 아닌 동맹국으로 취급한 것은 한국의 간첩죄 조항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례로, 한국전쟁 중인 1952년 3월 20일 오마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은 한국전쟁을 위해 만주와 중국을 폭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는 기회에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강력한 우리들의 우방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1952.3.22.<동아일보> 1면).
이렇게 미국이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은 우방'이라고 공언했기 때문에, 한국이 일본을 형법 제98조의 적국으로 간주하기는 곤란했다. 반일 제스처를 종종 취했던 이승만도 일본을 적국으로 규정하지는 못했다. 이승만 정권은 지난날의 식민 지배 문제와 관련해, 혹은 북한이나 소련에 대한 일본의 접근을 근거로 이따금 대일 적대감을 표시했을 뿐이다.
기밀 빼내도 집행유예... 간첩에게 참으로 관대했던 대한민국
▲ 서울형사지법 합의22부(재판장 김학대 부장판사) 1993년 12월 22일 군사기밀 유출사건으로 구속기소돼 징역 5년이 구형된 일본 후지TV 서울지국장 시노하라 마사토(40) 피고인에게 군사기밀 보호법 위반죄를 적용,징역 2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정으로 들어가는 시노하라 지국장
ⓒ 연합뉴스
이승만 정권은 일본에 적대적인 국민감정을 형법 제98조에 반영하지 못했다. 그래서 조총련과의 관련성만 없다면, 일본을 위한 첩보행위는 간첩죄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로 인해 빚어진 사건들 중 하나를 1993년 7월 14일자 <경향신문> 톱기사에서 접할 수 있다.
"서울지검 공안1부는 13일 일본 후지TV 서울지국장 시노하라 마사토 기자(39)가 군사기밀 14건 등 모두 50건의 문서를 빼돌려 이 중 27건을 일본대사관의 무관에게 전달한 사실을 밝혀내고 시노하라 기자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했다."
시노하라가 군사기밀을 북한이나 조총련에 제공했다면 군사기밀보호법이 아니라 간첩죄로 규율되면서,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졌을 것이다.
시노하라가 입수한 군사기밀은 상당한 고급 정보였다. 서울고등법원은 "국가의 안전보장에 명백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군사기밀"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법제하에서 그는 간첩은 아니었다. 1심인 서울형사지방법원은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이 아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2심 판결도 가벼웠다. 서울고법은 행위의 중대성을 인정하면서도 "취재 활동"이었다는 해괴한 논리를 제시하면서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석방시켰다. 북한 이외의 국가를 위한 간첩들에게 대한민국이 얼마나 관대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승만 정권 이래로 대한민국은 간첩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조직도를 그럴싸하게 그려내고 몽둥이질·물고문 등을 서슴치 않았다. 간첩 아닌 사람을 간첩으로 만드는 데 그처럼 많은 에너지를 투입한 대한민국은 북한 이외의 제3국이 보낸 진짜 간첩을 잡는 일은 외면했다. 말로는 안보를 강조했지만, 실상은 안보를 등한시했던 것이다.
그처럼 비상식적인 간첩죄 조항은 세계 첩보전의 흐름에서도 비껴가는 나라로 만들었다. 지난 9월 <민주주의와 인권> 제25권 제3호에 실린 이국배 숭실대 초빙교수의 논문 '간첩법과 결손국가'는 "20세기 초만 해도 유럽 여러 나라에서 첩보기관은 초보적 수준"이었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20세기 들어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진 혁신적 변화들, 즉 사회의 급속한 분화와 첨단기술의 발전 그리고 거듭된 세계대전은 첩보 분야의 일대 혁신과 급속한 확대를 가져왔다. 특히 양차 세계대전은 첩보 분야를 획기적인 변화로 이끌었다. 첩보전에서의 성패가 곧 전쟁의 성패를 결정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암호의 해독은 연합군 승리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히틀러는 기동성 있는 첩보전을 통해 동부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세계대전 과정에서 이처럼 큰 주목을 받게 된 첩보전은 이후 전면전이 사라진 냉전의 시기가 되자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시대의 변화는 첩보기관의 대형화와 전문화를 가져왔다. 미국의 CIA와 소비에트연방의 KGB는 그러한 시대적 변화의 산물이다."
세계 첩보전이 한층 첨예화되던 시절에 이승만 정권은 반대파를 북한 및 조총련과 엮어 처벌하는 용도로 간첩죄를 많이 활용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첩보전은 세계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을 오랫동안 답보했다. 이승만 집권기의 반공정책은 대한민국 안보를 실질적으로 퇴보시키는 것이었다.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