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어 지느러미 절단은 그가 누구보다 잘 아는 일이었다. 하디도 자신이 탄 배에서 그 일을 맡았다. 하디가 근무했던 배는 “참치 낚시에 딸려 온 상어만 잡은 것이 아니었”다. “허가받은 참치 어획량을 채우면 별도로 상어를 잡으러 다녔”다. “하루 수십마리를 잡았고 포획하면 안 되는 보호종의 지느러미도 잘랐”다. “지느러미를 절단한 몸통은 일부 보관하고 나머지는 바다에 버렸”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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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가명)가 다마르(가명)의 ‘소식’을 들은 것은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였다. 바다의 시간을 생각하면 드문 소식은 아니었지만 다마르의 이름을 듣는 소식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바다의 바닥까지 건져 먹는 미식가들 가운데 그 바다에서 다마르에게 벌어진 일을 기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하디
오션릴게임 는 소식이 날아들기 11년 전 다마르를 처음 만났다. 하디가 승선한 첫 한국 원양어선에 그가 있었다.
암본.
끊임없는 강진과 쓰나미 경보가 삶을 흔드는 섬(말루쿠제도). 넓고 깊은 바다 위에서 그들은 암본을 이야기하며 가까워졌다. 암본의 해운 학교를 졸업한 하디와 어머니 고향이 암본인 다마르는 형제가 됐다. 36살의 경험
사이다쿨접속방법 많은 다마르를 갓 선원이 된 19살 하디가 형처럼 따랐다.
인도네시아는 바다로 넘치는 나라였다. 그 나라 남자들은 자라서 ‘지구의 어부’가 됐다. 섬나라였으나 섬의 개수를 특정하지 못하는 모국을 떠나 세계 각국의 배를 타며 가족을 부양했다. 한국 선박에서 일하는 외국인 선원의 최다 출신국도 인도네시아였다.
하디는 13년
야마토통기계 동안 4척의 한국 배를 탔다. 모두 한 회사의 배였고 모두 참치잡이 배였다. 소식이 전해지던 날에 하디와 다마르는 대서양에 있었다. 같은 회사의 다른 배에서 일했지만 전화나 문자가 터질 때마다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한 사람의 식탁을 차리려면 전 지구가 동원돼야 했다. 다마르가 탄 원양어선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서아프리
바다이야기슬롯 카 해역을 누비며 조업했다. 주요 직급의 한국인 6명 외에 일반 선원 19명 전원이 외국인(인도네시아 15명, 베트남 3명, 중국 1명)인 배가 한국인들이 먹는 참치를 잡으러 나미비아 서쪽 해상으로 나아갔다. 배가 빗살무늬 항로를 그리며 낚시(연승)를 뿌렸다. 심장 박동에 맞춰 널뛰는 심전도 그래프처럼 수직으로 올라갔다 수직으로 내려오며 촘촘하게 바다를 훑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막대 모양의 항적이 하나씩 추가됐다. 오르락내리락하던 배가 7번째 막대의 아랫단에 이르렀을 무렵 날짜는 ‘그날’로 넘어가고 있었다.
오전 3시가 갓 지난 시각이었다. 한 선원이 바다로 떨어졌다는 소식과 구조 지원 요청이 하디가 탄 배로 수신됐다. 그때 하디의 배는 아이슬란드 해역 아래까지 북상해 있었다. 사고 지점으로 이동할 틈도 없이 선원의 사망 사실이 추가로 전해졌다. 다마르뿐 아니라 하디의 해운 학교 친구들이 여러명 일하는 배였다. 하디가 다마르와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 사고를 당한 선원이 누구인지 물었다. 경황이 없는지 한동안 응답이 없었다. 1시간쯤 뒤 답이 왔다.
바다로 뛰어들어 물에 빠진 선원을 건져 올린 사람은 하디의 문자를 받은 친구 중 한명이었다. 그가 추락 상황과 구조 과정을 상세히 묘사했다. 다른 친구들도 차례로 답을 하며 설명을 보탰다. 다마르는 끝까지 문자를 읽지 않았다. 하디는 친구들이 보내준 사진 속에서 주검이 된 다마르의 모습을 확인했다.
황망한 죽음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바다에 묶여 있었다. 다마르가 그의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으나 하디는 자신의 바다를 풀고 조문을 갈 수 없었다. 널뛰는 파도를 바라보며 하디는 다마르의 영혼이 항로를 잃지 않고 고향 집으로 돌아가길 빌었다.
“무슨 일 있어?”
언젠가 그 집으로 다마르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 동생은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어젯밤 꿈에 아버지가 찾아와 옆에서 주무셨다”는 형에게 아버지의 사망을 숨겼다. 혹시라도 형이 일을 그만두고 오면 조카들은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아이들 엄마는 집을 떠나 소식이 끊긴 지 오래였다. 돈을 벌어 뿔뿔이 흩어져 지내는 아이들과 모여 살 집을 얻는 것이 형의 소원이었다. 형은 육지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선원 계약이 끝날 때마다 뭍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어했지만 책임져야 할 입들이 많아 보수가 조금이라도 나은 뱃일로 돌아갔다. 아빠가 주검으로 돌아와 땅에 묻혔을 때 세 딸과 막내아들은 붉은 꽃이 뿌려진 무덤에 엎드려 울었다.
다마르의 죽음이 인지된 건 2년 5개월이 지난 뒤였다. 영국에 본부를 둔 국제비정부기구가 중국, 대만, 한국의 원양어선에서 일했던 외국인 선원들을 찾아 인터뷰했다. 단체가 불법어업과 인권침해 증언을 수집한 한국 선박 근무자만 150여명이었다. 그들 중엔 암본에서 만난 하디도 있었다. 다마르 사망 당시 일하던 선박과의 계약이 끝나자 하디는 더는 배를 타지 않았다. 암본에서 일을 구해 바다로부터 등을 돌렸다. 하디가 인터뷰 도중 다마르의 이야기를 꺼냈다. 바다에 묻혔던 그의 죽음이 뒤늦게 뭍으로 올라왔다.
다마르의 죽음은 바다로 무언가를 버리다 벌어진 일이었다. 그날 그 배는 참치를 잡고 있었지만 참치만 잡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연승엔 다른 어종이 딸려 올라왔다.
상어였다.
다마르는 참치를 냉동보관에 앞서 절단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갑판에 부려진 상어를 처리하는 일도 그의 역할이었다.
혼획(잡으려는 어종에 다른 종이 섞여 포획)된 상어라 해도 마음대로 할 순 없었다. 비싼 식재료를 노리는 인간들이 ‘지느러미만 도려낸’(샤크 피닝·shark finning) 뒤 바다에 버린 상어는 헤엄 능력을 잃고 가라앉았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샤크 피닝’을 엄격히 금지했다. 해역별 수산기구(조업국과 연안국 등이 결성한 국제기구)도 상어 보존·관리 의무를 부과했다. 피닝 자체를 불허하고 즉시 방류(전미열대다랑어위원회)를 요구하거나 지느러미를 잘랐다면 모든 부위를 맞춰 육지로 운반(중서부태평양수산위원회)토록 했다. 다마르가 탄 배는 남동대서양수산기구 관할 해역에 있었다. 피닝을 원천 금지하진 않았지만 어획한 상어 총무게의 5% 이하 지느러미(95% 이상의 몸통을 보관토록 해서 참치 저장 공간을 희생하면서까지 상어를 잡지 않게 하려는 규정) 보유만 허용했다.
오전 3시. 다마르가 “지느러미 자른 상어를 버리던 중”(하디)이었다. 갈고리를 이용해 현문(배 허리에 만든 출입구) 쪽으로 상어를 당기던 그는 제대로 박히지 않은 고리가 빠지면서 중심을 잃고 바다로 추락했다. 15분 뒤 하디의 친구가 갑판으로 끌어올렸을 땐 이미 의식이 없었다.
회사는 상어 지느러미와 다마르 사망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잡혀 올라온 상어를 규정대로 풀어주다 바다에 빠졌다’(회사 간부)며 지느러미 작업 자체를 부정하거나, 절단은 인정하되 ‘규정 한도 안에서 이뤄졌다’(변호인)고 반박했다. 다마르의 죽음을 알린 하디의 증언은 “신분조차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신뢰하기 어렵다”며 배척했다.
“자르지 않고 풀어주면 혼났어요.”
회사의 입장을 전해 들은 하디가 암본에서 추가 증언을 보냈다. 상어 지느러미 절단은 그가 누구보다 잘 아는 일이었다. 하디도 자신이 탄 배에서 그 일을 맡았다. 하디가 근무했던 배는 “참치 낚시에 딸려 온 상어만 잡은 것이 아니었”다. “허가받은 참치 어획량을 채우면 별도로 상어를 잡으러 다녔”다. “하루 수십마리를 잡았고 포획하면 안 되는 보호종의 지느러미도 잘랐”다. “지느러미를 절단한 몸통은 일부 보관하고 나머지는 바다에 버렸”다. “지느러미는 말린 뒤 어획물 창고 가장 안쪽에 감춰 검색을 피했”다. “석달에 한번씩 육지에 정박하면 중국인 등이 와서 지느러미를 보트로 실어갔다”고 하디는 말했다.
“이 사건 사고와 사망 경위, 피고의 선원 보호 의무 정도 등을 종합하면.”
법원은 회사 과실과 다마르 죽음의 “인과 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차별은….”
재해보상금의 ‘차별 없는’ 지급을 요구하며 다마르 유족이 제기한 소송이었다. 다마르의 ‘목숨값’은 한국인 선원이 받는 보상금의 3분의 1이 안 됐다. 한국 원양어선의 외국인 선원 차별(같은 배에서 같은 일을 해도 한국인보다 한참 낮은 최저임금 적용이 사망보상금에까지 고스란히 반영)이 재판 단계까지 올라간 최초의 사례였다.
“합리적인 근거가 있음.”
차별에 ‘합리적’이란 단어를 붙이는 세계(☞14회 ‘불공평한 날벼락’)가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할 만큼 정말 합리적인지는 의문이었다. 어떤 차별은 당연하다는 인식은 바닥 없는 바다만큼이나 아득하고 막막했다.
“제 심장이 멈췄어요.”
다마르의 시신이 인도네시아로 옮겨지고 있을 때 “한꺼번에 무너진 세상”에 남은 딸이 페이스북으로 아빠를 불렀다. 딸이 태그한 아빠의 사진 속에서 다마르는 참치 배의 나부끼는 태극기를 등지고 먼바다를 바라봤다. 그 바다 저편 태극기의 나라에선 상어 지느러미가 여전히 비싼 요리로 팔리고 있었다. 수요가 있는 한 공급도 계속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원칙을 지키느라 ‘합리적 세계’는 피투성이였다.
※2022년 10월 제기된 다마르 유족의 재해보상청구소송은 2025년 3월 법원의 화해권고 결정(청구 금액의 28.4%)으로 끝났다. 사망(2019년 10월) 6년 만이었다.
이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