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정 기자]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 상담소와 연극계 성폭력 피해자를 지지하는 이들이 11일 오후 3시 30분께 수원지법 복문 앞에서 배우 오영수씨의 강제추행 혐의 항소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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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추행 혐의를 받은 배우 오영수(80·본명 오세강)씨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가 무죄 판결을 내리자 한국여성민우회 등이 "성폭력 피해자를 입막음시키는 걸림돌 판결"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수원지법 형사항소6-1부(재판장 곽형섭)는 11일 오후 오씨의 항소심 공판을 열어 유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파
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법정에 피해자는 나오지 않았고, 피해자를 지지하는 한국여성민우회(민우회) 성폭력 상담소 활동가와 피해자의 법률대리를 맡은 김예지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등 25여명이 법정을 가득 채웠다. 남색 정장을 입은 오씨는 두 명의 법률대리인과 함께 출석했다.
지난 2022년 12월 오씨는 ① 2017년 8~9월 중
피해자와 산책을 하던 중 갑자기 양팔을 벌려 피해자를 강하게 껴안고 ② 2017년 9월 중 피해자의 주거지 앞 복도에서, 갑자기 피해자의 오른쪽 볼에 입맞춤을 했다는 혐의(강제추행)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에 지난 2024년 3월 수원지법 성남지원 형사6단독(재판장 정연주)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할 수 있다"라며 오씨에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바 있다. 이후 검찰과 오씨 측은 모두 양형 부당을 이유로 항소했다.
"추행 당했는데 일기 안 써서 의심스럽다"는 재판부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언행을 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이나, 그 부적절한 언행이 공소사실 기재와 같이 피고인이 피해자를 강제추행했는지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라며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원칙에 따라 유죄 판단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밝히며 원심 판결을 뒤집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먼저, ①번 공소사실에 대해 피고인이 피해자를 껴안기 전, "한번 안아보자"고 말한 것에 대한 피해자의 반응이 피해자 친구인 오아무개씨의 법정 증언 등과 피해자 진술이 일치하지 않은 점을 들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피해자의 거절하고 싶었다는 의사가 피고인에게는 표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라며 "피고인이 피해자 의사에 반해 피해자를 강제추행했는지, 강제추행에 고의성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 의문이 든다"라고 판단했다.
②번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피해 발생 6개월 뒤 방문한 부산 성폭력 상담소의 상담일지를 짚으며, "상담일지만 보면 피고인이 피해자의 볼에 뽀뽀를 한 것인지, 뽀뽀를 하려고 했던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혼란스럽거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일기를 쓴다고 진술했으면서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의 일기를 쓰지 않았다"라고 부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 유죄 판결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피고인의 사과메시지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내놨다. 피해자는 지난 2021년 10월, 오씨에게 '강제추행을 당한 기억이 자꾸 떠올라 괴롭다, 진심으로 사과를 받고 싶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보냈고, 오씨는 이에 "진심으로 사과한다,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싶은 심정이 지나친 행동으로까지 간 것 같다, 고맙고 애틋한 마음에 네가 딸 같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이성으로 느끼기도 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고, 후에도 그런 것 같다"는 내용으로 답한 바 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서도 "피고인은 사과를 하면 더 이상 (피해자가)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취지로 (메시지 내용을)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라며 "피고인이 출연한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상황을 고려할 때 피해자가 보낸 메시지 내용을 따지기에 앞서 사과를 한 행동이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라고 판단했다. 이외에도 재판부는 의심스러운 지점으로 피해자 주거지 복도의 구조, 센서등이 꺼졌는지의 유무와 피해자가 강제추행 발생 이후에도 피고인에게 감사·안부 메시지를 보낸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날 20여분 간 이어진 선고 공판이 끝나고, 오씨는 재판부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재판부가 판결하는 내내 눈물을 보이던 이소희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오씨에 "이 재판의 결과가 진실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해자 용기 무시, 억울한 피해에 눈감는 퇴행적 판결"
▲ 배우 오영수씨의 강제추행 사건의 피해자 변호를 맡은 김예지 변호사(법무법인 지향)이 11일 오후 3시 30분께 수원지법 복문 앞에서 오씨의 항소심 무죄 판결을 '2차 가해'라고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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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부터 피해자의 변호를 맡은 김예지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판결 뒤 "항소심 과정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그 자체"였다고 짚었다. 그는 "법원은 피고인이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제기한 억지 논리,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허위 주장, 지엽적인 사실관계 다툼에 흔들린 나머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했다"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피고인은 대선배이자 연극계 원로, 피해자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연극계에서 첫 걸음을 떼는 사회초년생이었다"라며 "피해자가 곧바로 고소하지 않거나, 감정을 억압해 일상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피고인에 대한 존경을 표하거나 친근하게 대하는 등 행동을 할 수 있는데도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는 계속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됐다"라고 밝혔다.
더해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더 바랄 것도 없다'라고 한 것에 대해 법원은 피고인이 '오징어 게임 실패를 우려해 문제가 될까봐 하지도 않은 일에 겁먹고 사과했다'는 피고인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받아 적었다"라고 부연했다. 또 "성폭력 상담소에는 상담일지가 사실대로 적혀 있는지 피해자가 확인하는 과정도 없는데, 상담일지 개별 문구로 피해자의 진술을 탄핵하는 것은 지극히 부당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피고인은 피해자가 '미투' 이후 용기를 얻어 피해 사실을 말한 것을 두고, '미투'를 이용하여 무고를 하려 했다는 취지로 주장했다"라며 "피해자들이 오랜 침묵을 깨고 피해 사실을 대면하고 용기내게 해준 미투를 오히려 가해자의 항변으로 이용하고 잘못된 통념에 호소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짚었다.
이어 "법원은 재판 과정과 오늘의 판결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하더라도 더 힘들지 않으려면 무조건 참으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남겼다"라며 "법원은 피고인의 잘못된 주장들에 흔들린 나머지 피해자의 용기를 무시하고 억울한 피해에 눈 감는 퇴행적 판결을 했다"고 비판했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 여전히 사소한 일로 취급"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 상담소와 연극계 성폭력 피해자를 지지하는 이들이 11일 오후 3시 30분께 수원지법 복문 앞에서 배우 오영수씨의 강제추행 혐의 항소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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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연극계 성폭력 사건 피해자 김산하(가명)씨는 "오늘의 무죄 판결은 단지 한 개인에 대한 판결이 아니다"라며 "이는 곧 예술계에서 일어난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여전히 사소한 일로 취급될 수 있다는 사회적 신호이기도 하다"라고 밝혔다.
방원숙 군포여성민우회 성폭력 상담소 소장이 대독한 입장문을 통해 피해자는 "사법부가 내린 이 개탄스러운 판결은 성폭력의 발생 구조와 위계 구조를 굳건히 하는 데 일조하는 부끄러운 선고"라며 "무죄 판결이 결코 진실을 무력하거나, 제가 겪은 고통을 지워버릴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어 "더 이상 문화예술계와 사회의 성폭력이 반복되는 구조를 방관할 수 없다"라며 "오늘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단단해진 마음으로 끝까지 진실을 이야기하겠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민우회 성폭력 상담소를 비롯해 피해자를 지지하는 이들 25여명은 공판 시작 전인 오후 2시 20분께 수원지법 북문 앞에서 '연극계 성폭력 당연히 유죄다', '연극계 성폭력 막을 내려라!', '심문의 대상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다', '피해자다움은 없다 낡은 통념 부숴라', '치기가 아니라 성폭력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다가, 피켓을 든 채 북문을 통해 법원으로 입장하기도 했다.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 상담소와 연극계 성폭력 피해자를 지지하는 이들이 11일 오후 2시 25분께 배우 오영수씨의 강제추행 혐의 항소심 선고 전, 피켓을 들고 수원지법 복문을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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