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문학 첨단의 감수성에 수여해 온 한국일보문학상이 58번째 주인공을 찾습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11월 하순 발표합니다.




박솔뫼 작가. 민음사 제공


사건에 집중하면 소설은 인과와 우열의 사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삶은 사슬에 묶인 인질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이 초라해진다. 그러나 그 튼튼한 사슬에서 벗어나면서도 삶을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세계를 뭉뚱그리지 않으면서 인생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순간의 감각을 가감하지 않으면서도 삶을 위한 은유를 완성할 수 있을까.
삶은 지독히 산문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감싸는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멜로디가 아 닌 리듬의 감각에 가까울 것이다. 몸의 움직임이 지닌 고유한 호흡, 그리고 그 움직임을 따라 조금씩 밀려나고 펼쳐지는 길의 강약과 장단 같은 것. 언제나 박솔뫼의 소설은 유려한 여행의 선율이 아니라 산만한 산책의 리듬을 구사한다.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은 모두 길에서 시작되어 길에서 끝나고, 등장인물들은 공기와 바람에 집중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들은 자신의 움직임에 골몰하고, 타인의 움직임을 유심히 훔쳐보며, 멜로디로 윤색할 수 없는 소음에 귀 기울인다.



박솔뫼의 '영릉에서'


그러니 산책을 요약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끊임없이 걷는 박솔뫼의 소설을 요 약하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다. 산책은 기승전결의 능선을 따라 깔끔하게 진행되지 않고, 산책에서 만난 모든 것은 산책의 주인공이 된다. 산책을 요약하면 남는 것이 없다. 삶을 가장 명쾌하게 요약한 문장이 '삶이 시작되었고 머지않아 끝났다'인 것과 마찬가지로. 삶은 어쩔 수 없이 아날로그적이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살았는지, 무엇을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 , 뚜렷한 경계를 긋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 않은 것 하지 못한 것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것은 함께한다 언제나."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산문적인 삶에도 시적인 순간은 도래한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책을 통해 낯선 사람들이 연결되는 "브라우티건적 우연"처럼, 확률과 통계로 구획된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길을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누군가를 만나고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을 경험한다. 그 만남은 금세 휘발될 수도 오래 지속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우연한 충돌만이 삶을 무정형으로 펼치고 변형시킨다는 사실이다. 기만 없이도 운명을 긍정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박솔뫼를 따라 길을 걸으며 타인과 마주치면 된다. 목적지를 향해 지도를 들고 떠나는 성장 서사가 불가능해진 현대의 삶에 대해, 박솔뫼의 소설은 정직하고도 아름다운 비유를 완성해낸다.



제58회 한국일보문학상 본심 진출작. 그래픽=김대훈 기자


이소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