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6·25 전쟁 75주년 기획 ‘명장’은 전쟁을 이끈 현역 장군들의 리더십을 소개하는 기사입니다. 그런데, 이번 회차는 당시 민간인이던 미 국방장관 조지 마셜의 이야기입니다. 엄밀한 의미의 '현직 장군'은 아니었지만, 마셜이 종신직 원수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고 한국전쟁 국방력 강화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다는 점에서 '명장 리스트'에 포함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미국의 제2대 국방방관 루이스 존슨. 미 의회도서관
릴게임사이트 “우리는 그를 증오했다. 밤이고 낮이고 저주했다. 그를 저주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까지 저주했다.”
1950년 9월 한국에 파병 되던 미 육군 포병장교 제임스 딜 중위가 남긴 기록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전쟁 참전을 위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던 미군 장병이다. 그렇다면 모든
바다이야기오락실 미군이 증오했다던 ‘그’는 누구였을까? 김일성? 스탈린? 아니다. 당시 미군이 치를 떨었던 공공의 적은 미 국방정책을 책임진 제2대 국방장관 루이스 존슨(1949~1950년 재임)이다.
적국 지도자도 아닌 아국 국방장관이 이렇게까지 일선 장병의 원성을 산 이유는 무엇일까. 존슨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미군의 급격한 군비 축소를 주도한 장본인
릴게임하는법 이다. 그래서 딜 중위는 존슨을 두고 “그는 뼈가 보일 수준까지 육군 전력을 감축했다”며 “(그로 인해) 나와 내 동료들이 죽을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졌다”고 치를 떨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19일 일본 도쿄를 방문한 루이스 존슨(왼쪽) 미 국방장관과 오
오징어릴게임 마 브래들리(오른쪽) 미 합동참모본부 의장이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와 함께 병력을 살피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국방력을 망친 국방장관
변호사 출신 존슨은 1948년 대선에서 해리 트루먼 캠프 모금 책임자로 기여한 공로 덕에 트루먼 정부 2기 국방장관직을
오션파라다이스예시 전리품으로 따냈다. 군무와 국방행정엔 문외한이었음에도, 평화 시기 대규모 군축을 단행한 뒤 그 성과를 발판으로 1952년 대선에 출마(민주당)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2차대전이 끝난 1945년, 830억 달러였던 미 국방예산은 1948년엔 9분의 1(91억 달러)로 급감해 있었다. 1949년 3월 국방장관에 취임한 존슨은 여기서 더 허리띠를 졸라맸다. 예산 삭감 대상은 주로 해군과 해병대. 취임 한 달 만에 초대형 항공모함 유나이티드 스테이츠의 건조 계획을 취소해 ‘제독들의 반란’(해군 장성 집단 반발)을 야기했고, ‘한물간 상륙작전’(합동참모의장 오마 브래들리의 표현)이나 하는 해병대도 축소 대상이었다.
육군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5년 종전 당시 825만 명이던 미 육군 병력은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59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사단 수는 89개에서 10개로 줄었는데, 그나마도 전투에 즉각 투입 가능한 완전편성 사단은 단 하나에 불과했다. 신무기 개발 계획이 잇따라 취소돼 ‘세계 최강’ 타이틀이 무색하게 미군은 구식 무기와 장비를 쓰고 있었다. 사기는 엉망이었고, 훈련은 거의 없었다. 육군 전력 약화는 결국 6·25 전쟁 극초반(7월 첫 병력 투입~낙동강 전선 직전) 미군의 졸전으로 이어진다.
2차대전~한국전쟁 미국 국방예산 변화. 그래픽=박종범 기자
“루이스 존슨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국방장관이다. 신뢰할 수 없었고, 교활했으며, 그가 하는 모든 것이 나빴다.”
(한국전쟁 당시 국무장관 보좌관 루셔스 배틀)
존슨은 군대만 망친 게 아니었다. 큰 키에 거대한 몸집(113㎏)의 위압적 외모처럼, 성격도 매우 거칠었다. 고압적이고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다른 장관의 험담을 일삼았던 성정 때문에, 그가 재임한 1년간 펜타곤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존슨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 총애를 받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을 특히 미워했다. 애치슨에 대한 개인적 반감 때문에 포기 바텀(국무부 별칭)과 펜타곤 사이의 정책 협의 라인은 하나둘씩 끊어졌다.
기관 간 공조는 엉망이었다.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중순, 존슨은 더글러스 맥아더를 만나러 일본을 방문했다가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북한이 즉시 공격할 수 있다’는 첩보를 전해 들었다. 그러나 존슨은 “늑대가 나타났다는 외침이 너무 자주 들려 믿을 수가 없다”며 CIA 경고를 묵살했다. 존슨이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한국에서 전쟁이 터졌다.
트루먼은 존슨의 이런 무능과 좌충우돌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당선의 은인에게 기회를 더 주려 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존슨이 자신의 정적인 로버트 태프트 공화당 상원의원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선 해임을 결심했다. 존슨은 사직서에 서명을 종용한 트루먼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간청했지만, 대통령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존슨이 물러난 1950년 9월 19일 워싱턴 관가에선 안도의 한숨이, 한반도 전장에선 이제 살았다는 환호성이 터졌다. 존슨 사임 소식이 전해진 순간, 태평양 병력수송선 안에 있었던 딜 중위가 기록한 현장의 분위기는 다음과 같다.
“배 안에선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장병들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배 전체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장병들은 서로의 등을 두드리고 박수를 치며 반겼다.”
조지 마셜 이력. 그래픽=박종범 기자
‘소방수’ 마셜, 다시 불려오다
장병들이 환호한 또 다른 이유는 존슨 후임이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조지 마셜이다. 마셜은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던 당일(1939년 9월 1일) 미 육군참모총장에 올라 꼬박 6년을 육군 최선임 장교로 일했다. 1945년 은퇴 후 잠시 한가한 노후를 즐기는 줄 알았지만 ①중국 주재 특사(1945년) ②국무장관(1947년) ③미 적십자사 총재(1949년) ④국방장관(1950년) 등 네 번이나 더 트루먼의 부름을 받았다. 대통령과 정권에 골치 아픈 과제가 등장할 때마다, 검증된 소방수 역할을 떠맡은 ‘트루먼의 해결사’였다.
마셜은 2차 대전 때 육군참모총장으로 4개 대륙(유럽·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 동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다. 전쟁 전 포르투갈보다 규모가 작았던 미 육군(17만 명)은 마셜의 비범한 기획·인사·병참·보급 능력 덕분에 종전 시 825만 명의 압도적 세계 최강 전력으로 발돋움했다. 초한전쟁에서 항우를 무찌른 유방의 뒤에 승상 소하의 보급이 있었던 것처럼, 맥아더·아이젠하워·패튼의 화려한 전공은 마셜이 미 육군의 시스템과 인프라를 단시간에 구축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셜은 연합국 승리의 각본을 짰고 승리의 방정식을 설계했다.
또 마셜은 전후 대규모 유럽 원조 계획(마셜플랜)을 주도하며 폐허가 된 서유럽을 재건한 서방 민주주의의 수호자였다. 133억 달러 원조 덕분에 1952년 서유럽 모든 나라의 경제력은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다. 독일·터키·그리스에 대한 원조는 소련의 서진에 대비하는 든든한 방파제였다. 이 공로로 마셜은 1953년 당시 직업군인으로선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군사와 외교 양쪽에서 거둔 엄청난 성공 덕분에, 군부와 외교가엔 마셜의 추종자들이 넘쳤다. 마셜은 정계에서도 정파 구분 없이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루이스 존슨 퇴장 후) 펜타곤 사기를 올리기 위해, 트루먼은 과거 자기가 ‘살아있는 미국인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불렀던 사람을 다시 소환하기로 했다.”
(미국 군사저술가 칼 보크런드)
1945년 9월 2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 문서 원본을 들고 있다. 왼쪽부터 제임스 포레스탈 해군장관, 헨리 스팀슨 육군장관,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 트루먼 대통령. 해리 트루먼 도서관
공적인 인간의 표상
①세계대전 육군 수장 ②냉전 시초 국무장관 ③냉전 중 첫 열전(한국전쟁)의 국방장관을 차례로 역임한 12년 동안, 마셜은 미국과 서방에 대체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그 콧대 높은 윈스턴 처칠이 마셜을 “(세계대전) 승리의 진정한 기획자”라 불렀고, 트루먼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셜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야당인 공화당의 의원들도 대부분 마셜을 높이 평가했다.
물론 마셜을 미워한 사람도 있기는 했다. 그중 한 명은 마셜을 공산주의자 앞잡이로 매도한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매카시즘 주동자)였고, 나머지 하나는 한국전쟁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였다. 마셜은 1차 대전 때부터 이미 유능한 장교로 이름이 높았지만, 맥아더는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절(1930~1935년) 고집스럽게 마셜의 장성 승진을 거부했다. 계속 인사에서 물 먹은 마셜이 군을 떠나려고 했던 시기도 있었다.
매카시가 마셜을 싫어한 것은 정치적 이유(이념몰이) 때문이었지만, 맥아더가 마셜을 저평가한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맥아더의 견제심리가 작동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개인적으론 매우 자존심 강한 군사적 천재가 다른 군사적 천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파벌 측면에서 보자면 미 육군 내 아시아 중시 세력(맥아더)이 유럽 우선주의자(마셜 및 합동참모본부)의 극동 군사정책 개입을 강하게 배척하려 했던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역사적으로도 ‘문제적 인물’이었던 저 특이한 두 명 정도만 뺀다면, 모두가 마셜을 사랑했고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당대의 마셜은 훌륭한 군인이자 위대한 정치가로 평가받았지만, 후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가 보여준 비범한 리더십이 현대 정치 지도자와 기업 경영자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마셜의 생애를 연구한 군사역사가들은 대부분 그의 리더십을 성공의 요인으로 꼽는데, 아예 마셜 리더십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도 적지 않다.
마셜이 보여준 리더십의 원칙. 그래픽=강준구 기자
이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인간 마셜의 특징이 바로 ‘철저한 공적 마인드’다. 그는 대통령을 모실 때나 부하를 대할 때나 차등을 두지 않고 공평무사함을 유지했다. 공무에 절대 사적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았고, 자신의 영광보다 나라와 조직의 공동선을 추구했으며, 불필요한 권위나 허례허식을 배제하고 항상 대의를 위해 일했다. 마셜은 상관이든 부하든 절대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지 않았고, 상대방도 그를 이름으로 부를 수 없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조차 마셜을 ‘조지’라고 부를 수 없었다. (여기엔 예외가 있는데, 그 인물은 역시 맥아더다. 맥아더는 6·25 전쟁 당시 국방장관 마셜에게 보낸 답신에서 상관인 마셜을 ‘조지’로 언급했다.)
이런 강직함을 예외없이 수십 년간 유지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마셜이 하려는 일은 틀림이 없다’는 믿음을 줬다. 마셜이 공공선을 위해 자신의 명예를 기꺼이 버릴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 대표 사례가 바로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총사령관 선임 때다. 2차대전 유럽 전선의 하이라이트였던 노르망디 상륙은 단순한 군사작전이 아니라 여러 국가(미영프캐호 등)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연합군 육해공군 수십만 명을 지휘하면서, 민간의 협조까지 이끌어야 하는 일종의 ‘초대형 사업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일반 야전사령관보다 마셜 같은 최고경영자(CEO)형 장군이 사령관에 더 어울렸다. 게다가 노르망디 연합군 총사령관은 역사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길 것이 분명했고(실제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이 됐다), 마셜 스스로도 이런 역사적 작전을 주도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 루스벨트는 스탈린·처칠·드골·장제스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연합국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면서 세계 대전략을 짤 수 있던 유일한 인물인 마셜을, 특정 지역 작전에 보낸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마셜은 루스벨트가 참석했던 카사블랑카·퀘벡·카이로·테헤란·얄타 등 모든 연합국 정상회담에 동석했던 핵심 참모였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마셜을 워싱턴에 붙잡아 둘 방도를 고민했고, 마셜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마셜은 군말 없이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연합군 사령관으로 선임된 후배 아이젠하워를 지원하는 일에 착수했다.
당시 루스벨트는 이런 말로 마셜의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나는 당신이 이 나라를 떠나면 잠을 한숨도 못 이룰 것 같소.”
마셜의 복귀 후 강화된 미국의 전력. 그래픽=박종범 기자
미군 전투력 복원
1950년 9월 21일. 그처럼 완벽한 인간 마셜이 현업으로 돌아왔다. 6·25 전쟁이 터진 지 세 달 만에, 그제야 미국은 국방장관다운 국방장관을 앞세워 수렁에 빠진 한반도 전황을 헤쳐나갈 수 있게 됐다. 능력, 평판, 업무 장악력, 의회와의 관계, 임명권자의 신임 등 모든 면에서 마셜의 자격은 충분했다. 단 한 가지 걸리는 것은 건강. 신장 한 쪽을 떼낸 대수술의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70세 노인의 체력이 국방장관이란 중책을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시 미국 남성의 평균수명이 65세였다. 마셜은 트루먼에게 6개월에서 1년 정도만 장관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양해를 구했다.
시간이 없었다. 마셜이 국방장관 취임 직후부터 가장 힘을 쏟은 것은 군의 규모를 확대하는 일이었다. 의회를 설득해 국방예산을 늘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애초 1951회계연도(50년 7월~51년 6월)에 책정된 미 국방예산은 133억 달러였으나, 마셜의 끈질긴 설득을 통해 최종적으로 490억 달러로 3.7배 증액됐다. 이를 바탕으로 미군은 신속하게 전력을 증강해, 1950년 6월 기준 150만 명이던 전체 병력(육·해·공·해병)을 불과 1년 만에 320만 명으로 늘렸다. 육군 사단은 10개(완전편성 1개)에서 18개(완전편성 15개)로 대폭 확충했고, 항공모함을 1년 만에 11척(15→26)이나 찍었다. 거의 해체 수준이었던 해병대도 2개 완전편성 사단을 보유하게 됐다.
“사기(morale)가 있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고, 그게 없다면 계획·준비·생산 등 다른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1941년 조지 마셜의 트리니티 대학 연설)
미국의 군비 증강은 6·25 전쟁 동안에만 유효했던 것은 아니다. 마셜이 시작한 국방비 지출 확대는 냉전 기간 내내 미국 안보정책의 핵심 기조였다. 한국에서 군축의 부작용을 심각하게 경험한 미국은 그 이후부턴 평화기에도 군비 지출을 계속 유지했고, 강한 국방력은 결국 소련과의 체제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마셜 전기를 쓴 미 언론인 에드 크레이는 “마셜 덕분에 미국 군사정책이 다음 세대로 진화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마셜은 군의 병력·장비만 강화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예전부터 군의 물적 요건만큼 강조했던 것이 장병들의 사기 고양이다. 마셜이 육군참모총장 및 국방장관으로 재직할 당시부터 미군은 세계 어느 나라 군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군인 복지에 대규모 예산을 투자했다. 우리가 2차대전을 다룬 영화·드라마에서 자주 봤던 ‘여유롭고 풍족한 미군’, 이를테면 ①전쟁 도중 휴가를 나가는 장교 ②최전방 병사에게 가족의 편지가 제때 전달되는 우편 시스템 ③전투가 없는 날 병사들이 모여 할리우드 영화를 감상하는 장면 ④휴식시간 농구·야구로 시간을 보내는 병사의 모습 ⑤담배·사탕·초콜릿의 풍부한 보급 상황 등은 모두 마셜이 추진한 사기 진작책이 현장에 반영된 결과다.
당시 미군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준 가장 효과적 수단 중 하나는 바로 아이스크림이었다. 미군은 이미 2차대전 당시 최전선 장병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보급할 목적으로 대형 바지선을 개조해 ‘바다 위 빙과공장’(보급선)을 운영한 전례가 있다. 6·25 전쟁에서도 미 국방부는 한국에서 싸우는 유엔군 장병을 위해 각 사단 보급중대에 아이스크림 기계를 배치한 다음 △동계 주 1회 이상 △하계 주 2~4회 아이스크림 보급을 보장했다. 당시 아이스크림은 유엔군 사이에선 모든 보급품 중에 가장 인기가 좋았던 품목이었다고 한다.
“마셜은 불안한 시대 미국에서 안정감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펜타곤은 바로 그런 안정감을 필요로 했다.”
(미국 군사저술가 칼 보크런드)
해리 트루먼(오른쪽) 대통령이 맥아더와의 웨이크섬 회의를 마치고 귀국한 1950년 10월 18일, 딘 애치슨(왼쪽) 국무장관과 조지 마셜 국방장관이 트루먼을 맞이하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국무부와의 공조체제 복구
마셜이 장관 취임 후 역점을 둔 또 다른 과제는 외교안보 관련 부처가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으로 봐도, 패권국가의 외교·군사 정책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가야 마땅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던 전임자 존슨이 그 공조체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미국의 외교와 군사는 따로 놀았다. 냉전 초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는 소련의 팽창을 틀어막는 봉쇄정책이었음에도, 정작 미국은 지나친 군축 탓에 군사 억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군사력만으로 공산세력을 한반도에서 밀어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진 만큼, 한반도에 민주주의 교두보를 유지하려면 외교적 노력도 뒤따라야 했다. 국방부와 국무부의 공조체제 회복이 시급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철저히 공적인 인간’ 마셜의 진가가 발휘된다. 국방장관 취임 당시 마셜은 70세, 국무장관 애치슨은 57세였다. 마셜이 국무장관일 때 애치슨은 국무차관이었다. 나이도 어리고 예전의 부하였던 애치슨을, 마셜은 철저하게 윗사람으로 모셨다. 미국 내각에서 국무장관은 장관 서열 1위, 국방장관은 서열 3위(2위 재무장관)다. 애치슨은 존슨 대신 마셜이 온 것을 크게 반겼지만, 유일하게 의전에서 불편함을 호소하곤 했다. 나중에 애치슨은 “널리 존경받는 옛 상사가 나에게 상석을 양보하고, 회의실에 먼저 들어가길 권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마셜이 애치슨을 미국 외교안보 정책의 중심 축으로 인정하면서, 국무부와 국방부의 갈등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제부터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 공산주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당근(외교)과 채찍(군사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재건된 외교·군사 공조 체제는 1951년 7월부터 이어진 유엔군-공산군 간 휴전 협상에서 힘을 발휘했다. 미국은 외교와 휴전을 통해 이 전쟁을 끝내려는 원칙을 세웠으면서도, 공산군이 판문점에서 억지를 부릴 때마다 전방에서 강력한 화력으로 공산군의 인명 손실을 강요했다. 이런 당근-채찍 전략을 통해 휴전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다.
“지역 전구(戰區) 사령관이 미국 대외정책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반대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맥아더의 해임은 그래서 필요했다.”
(조지 마셜 당시 미 국방장관)
더글러스 맥아더(왼쪽) 미 육군 원수와 히로히토 일왕이 1946년 7월 일본 도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서 만났다. '사람의 모습을 한 신'으로 여겨졌던 천황을 옆에 두고, 뒷짐을 진 채로 삐딱하게 서 있는 맥아더의 모습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맥아더 사태 해결
국방장관 마셜 앞을 가로막은 가장 어려운 과업은 국무부와 정책을 조율하는 것도, 상하원의원들을 일일이 만나 예산 증액의 필요성을 장시간 설득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셜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바로 한국 전선을 책임진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를 제어하는 일이었다.
국방장관이 합참을 통해 야전사령관 하나를 통제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일까 싶지만, 맥아더는 그렇게 간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2차대전 유럽 전선에선 전쟁 영웅의 영예를 아이젠하워 몽고메리 패튼 브래들리 등이 나눠 가졌지만, 태평양 전선 육군의 명예만큼은 맥아더가 독차지했다. 맥아더는 미국 국민 사이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현역 군인이었고, 특히 공화당 정치인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육사 한참 후배인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1915년 임관)나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1917년)가 맥아더(1903년 임관)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맥아더가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는 사람은 그와 동갑이었던 국방장관 마셜(1902년 임관)밖에 없었다.
대통령 트루먼도 맥아더를 해임하겠다는 마음을 품고서(1950년 8월) 6개월이 지난 다음에야(1951년 4월) 실제로 맥아더를 경질할 수 있었다. 트루먼이 여론 때문에 자신을 쉽게 자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맥아더는 대통령과 합참의 지시를 대놓고 무시하며 함부로 굴었다.
맥아더의 불충을 애써 외면하던 트루먼의 역린을 건드린 건 이번에도 ‘내통’(존슨처럼)이었다. 트루먼은 ①맥아더의 명령 불복종 ②정부 정책과 상반되는 연설 ③워싱턴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인터뷰 ④대통령이 발표를 준비하던 중대 의제 가로채기 등은 다 참을 수 있었지만, 맥아더가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조셉 마틴)에게 편지를 보내 백악관의 외교정책을 명시적으로 반대한 일만은 묵과할 수 없었다. 편지가 하원에서 공개된 시점이 1951년 4월 5일이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갈등 사례. 송정근 기자
군부 기반이 약하고 공화당에 적이 많았던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려면 마셜의 권위에 기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셜이 반대하는 맥아더 해임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4월 6일 첫 대책회의에서 트루먼이 조언을 구했을 때, 마셜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한국에서 전쟁을 지속하고 국방비를 늘려야 하는 시점에 야당(특히 공화당 원내대표)과 척을 지는 일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대책회의가 이어지는 동안 마셜은 트루먼이 사임 의사를 누그러뜨리지 않을 것임을 확인했다. 결국 맥아더를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하되, 그 파급효과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정리해야 했다.
마셜이 선택한 방식은 맥아더 경질을 ‘매우 공적인 결정’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이었다. 맥아더가 함부로 굴었기 때문에 자르는 게 아니라, 행정부와 의회가 신중한 논의를 거쳐 처리, 정립한 대외정책 기조를 존중하지 않는 장군에게 더 이상 대군을 맡길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중에 트루먼이 “나는 맥아더가 멍청한 개자식이라서 해고한 게 아니라, 그가 대통령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고했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월 11일. 최대한 정제된 표현으로 발표되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맥아더 해임의 충격은 미국 전체를 흔들었다. 인기도 없는 대통령(1951년 중반 트루먼 지지율은 워터게이트 때 닉슨보다 낮았다)이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군사적 영웅을 함부로 찍어냈다. 여론은 맥아더의 해임을 이런 식으로 바라봤다. 야당은 탄핵을 언급했고, 성난 군중은 트루먼 인형을 만들어 목을 매달았으며, 트루먼은 야구장에 갔다가 관중의 야유를 받는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분노한 여론과 야당의 공세를 무마하는 일은 마셜과 합참의 몫이었다. 1951년 5월 3일부터 6월 27일까지 열린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마셜과 브래들리는 맥아더 해임은 피할 수 없었던 결정이었고 맥아더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는 점을 일깨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셜이 결코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공화당 의원들은 차츰 공세의 고삐를 늦췄고, 국민들도 말을 듣지 않는 야전사령관을 해임할 정당한 권리가 대통령에게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군이 자신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병영국가로 가려는 상황에서, 조지 마셜이 돌아온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마셜 취임 시 워싱턴 포스트의 평가)
조지 마셜 미 육군 원수. 해리 트루먼 도서관
가장 위대한 군인 마셜
맥아더 경질 직후 들불처럼 타오르던 여론의 분노가 비교적 신속하게 진화된 것은 2차대전 영웅들이 나서 “대통령 말이 맞다”는 점을 소상하고 단호하게 밝힌 덕분이었다. 국방장관 마셜, 합참의장 브래들리, 육군참모총장 콜린스가 한목소리로 경질의 정당성을 차분하게 설명하자, 여론은 조금씩 누그러졌다. 맥아더는 해임 직후만 해도 반트루먼 여론을 등에 업고 1952년 대선의 공화당 유력 후보로 거론됐지만, 의회 청문회를 거치면서 신드롬의 거품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마셜만큼 신의가 두텁고 성실한 군인이었던 아이젠하워가 공화당 간판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세계를 흔들었던 맥아더 경질 파동의 교훈은 ‘아무리 위대한 군인일지라도 민간 지도자의 정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는 평범한 명제(문민 통제의 원칙)다. 국민이 뽑은 권력이 장군에게 휘둘리고, 국민의 선택을 받은 권력이 군의 간섭을 받는다면 그건 이미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닌 상태다. 미국 역사에서도 맥아더 해임 사건은 남북전쟁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의 조지 매클렐런(북부군 총사령관) 해임과 함께, 문민 권력의 우위를 상징하는 중요 사례로 언급된다.
당시 맥아더는 국민의 인기를 등에 업고 있었지만, 트루먼에겐 ‘마셜’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마셜이 야당을 설득했고, 국민을 달랬고, 군부의 의견을 하나로 모았기에 ‘덜 유명한 사람이 더 유명한 사람을 해임’(당시 타임지 표현)할 수 있었다. 마셜은 맥아더에 버금가는 전쟁영웅이었지만, 결코 선출권력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군인으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았다.
마셜이 맥아더 항명 사태를 빨리 무마한 것은 트루먼 정권에 큰 도움을 줬을 뿐 아니라, 미국이 한국전쟁에 계속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영향을 줬다. 맥아더 동정론이 반전 여론으로 변질되거나 트루먼 정권 심판론으로 이어졌더라면, 미국 정부의 전쟁 수행 능력에는 심각한 차질이 있었을 것이다.
1950년 말과 1951년 상반기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당한 패배를 수습하고 힘겹게 재반격을 시도하던 시기였다. 6·25 전체 기간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이 시기에 다행히도 워싱턴에선 마셜이 중심을 잡고 있었다. 미군은 초반의 후퇴를 극복하고 발 빠르게 전력을 증강할 수 있었고, 국군도 미군의 물적 지원 덕분에 전투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장군의 지략, 병사의 용기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국력과 군사력을 잇는 굳건한 징검다리, 경제력을 전투력으로 신속 정확하게 전환하는 효율적 행정력이 필수적이다. 2차대전 미국의 경제력을 최강 군사력으로 구현했던 마셜은 한국전쟁에서도 승리를 위한 물적 토대를 닦았다. 개인적인 야심만 앞섰던 전임자 존슨이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일이다.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마셜의 행적 및 업적>
-Jack Uldrich ‘Soldier Statesman Peacemaker: Leadership Lessons from George C. Marshall’
-Ed Cray ‘General of the Army : George C. Marshall, soldier and statesman’
-Forrest C. Pogue ‘George C. Marshall: Statesman 1945~1959’
-Stephen Taaffe ‘Marshall and His Generals’
-Jared Dockery ‘Return to the Pentagon: Marshall and the Korean War’
-Molly Guptill Manning ‘Morale: Marshall’s Secret Weapon’
-Carl Borklund ‘Men of the Pentagon, from Forrestal to McNamara’
-Leonard Mosley ‘Marshall, Hero for Our Times’
<당시 미국 정부 내 상황>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Joseph Goulden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John Spanier ‘The 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f the Korean War’
이영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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