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영 기자]
비평가로서 나는 한국문학의 곤경 중 하나가 악을 제대로 형상화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정유정 소설을 평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인간 내면의 이야기 중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악의 문제다. 최근 한국문학은 악의 실체를 탐구하는 데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한국문학은 너무 착하다. 현실은 악이 지배하는데 문학은 착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결함이다. 한국문학이 악을 그리는 유효한 장치인 장르문학의 틀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데 작가들이 관심이 없다는 것이 핵심 이유라고 나는 판단한다. 한국문학이 내면화되고 나약해지는 이유 중 하나. 현실에서 발견되는 악의 문제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그 실체를 파헤치려는 도전정신과 그를 위한 다
학자금대출조건 양한 장르와 형식과 기법의 혼종성 실험이 태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정유정의 작품들은 주목할 만하다." (오길영, <아름다움의 지성>)
선과 악의 갈림길
양도세 감면 ▲ 애니메이션 영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의 한 장면. 코쵸 시노부와 도우마의 결전 장면.
ⓒ 애니맥스브로드캐스팅코리아
자동차 할부 이자율 그렇다면 악의 뿌리는 무엇인가? 요즘 화제작인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아래 <귀칼>)에서 절대 악을 보여주는 최초의 혈귀 키부츠지 무잔을 보면서 그 답을 생각했다. 결론을 당겨 말하면 인간의 유한성을 부정하고 불멸, 영생의 삶을 욕망할 때 악이 탄생한다. 이미 1천 년의 삶을 살아온 무잔
러블리단비 은 햇빛에도 버틸 수 있는 능력을 얻어 영생에 도달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 목적을 위해 혈귀 세력을 만든다.
무잔도 인간일 때가 있었다. 그는 인간일 때부터 병약했고 죽음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때문에 피의 실험을 통해 오니(도깨비)가 되었다.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 동안 인간성을 철저히 버리고 타
보험설계사 시험 인의 고통을 수단화하면서 단순한 악에서 사악함의 표본으로 타락한다.
그런데 이런 불멸성의 욕망, 죽음의 거부는 무잔에게서만 확인하는 게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해서 나타난 욕망이다. 우리 시대 물신주의의 대상인 돈과 권력도 불멸 혹은 영생의 욕망과 관련된다. 인간은 유한하기에 그 유한성을 넘어서 영원히 지속되는 물신(物神)이 된 돈과 권력을 불멸성의 대체물로 삼는다.
원시 사회에서는 제의를 통해 신에 대한 복종이 작동했듯이, 우리 시대 돈과 권력은 신적인 신성함을 대체하는 대상, 곧 물신이 된다. 인간은 권력과 돈이라는 물신을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한다.(어니스트 베커, <악에서 벗어나기> 참조) 그 대상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방도라고 여긴다. 그렇게 인간이 자신의 유한함을 망각할 때 악이 탄생한다.
<귀칼>을 보면서 나는 악의 문제를 떠올렸다. 여러 평자가 지적했듯이 <귀칼>은 다소 뻔한 이야기 구성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시청각적 활력을 강렬한 이미지로 제시한다. 이 영화를 되도록 큰 화면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귀살대와 혈귀들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색채와 이미지(물, 불, 용, 번개, 벌레 등)는 화려하고 격투 장면에서 칼이 부딪치는 음향, 장면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음악도 인상적이다. 실사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 영화로서 극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더욱 흥미롭게 본 것은 귀살대와 혈귀들 각자의 사연과 과거 이야기다.
<귀칼>에서는 절대악인 무잔이 전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후속작 두 편이 나올 예정이다), 이 캐릭터가 지닌 사악함을 비난하기 전에, 그가 혈귀를 만드는 과정, 혹은 인간이 혈귀가 되어가는 과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 문화에서 인간과 비인간(도깨비, 귀신, 악귀 등)은 독특한 관계를 갖는다는 걸 일본 작가 미야베 미유키가 쓴 여러 편의 에도 시대 시리즈 소설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범박하게 정리하면, 인간과 도깨비는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고통 속에 놓인 인간이 그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악의 손을 붙잡을 때 탄생한다. <귀칼>에 나오는 혈귀들, 그리고 귀살대도 다 나름의 상처를 갖고 있다. 귀살대는 그런 고통의 순간에 악의 손길을 거부하면서 혈귀와 싸우는 길을 택한다. 혈귀들은 그 유혹에 넘어간 자들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참을 수 없는 삶의 고통이 악으로 가는 길을 연다. 그 길로 갈지 말지를 선택하는 데서 선과 악의 갈림길이 나뉜다.
아카자의 깨달음
▲ 애니메이션 영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의 한 장면.
ⓒ 애니맥스브로드캐스팅코리아
<귀칼>에서 가장 돋보이는 캐릭터인, 혈귀의 최고 집단인 상현 중 세 번째 서열인 아카자가 좋은 예다. 아카자와 대립 구도를 이루는 캐릭터가 염주 렌코쿠라는 귀살대 핵심 요원이다. 렌코쿠는 <귀칼>의 앞선 작품인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에서 아카자와 싸우다가 패배하고 죽는다. 렌고쿠는 죽음 직전 환영처럼 어릴 때 어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어머니는 자신이 지닌 강한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묻는 어린 렌코쿠에게 이렇게 말한다. "힘을 가진 자는 약자를 지켜야 한다. 그것이 주어진 사명이다." 렌코쿠는 불멸의 욕망과 관련된 악의 손길을 거부하면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숙명을 받아들인다. <귀칼>의 아카자는 렌코쿠의 모습과 대조, 혹은 비교가 된다. 그러나 결국은 렌코쿠와 같은 길을 걷는다.
악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것이 한국문학의 아쉬움이라고 적었지만, 악을 제대로 그리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악과 선의 경계를 숙고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불멸의 욕망에 사로잡힌 무잔 같은 악귀도 있지만, 대부분 악은 선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카자가 두드러진다. 영화를 보고 나서 궁금해서 아카자라는 이름의 의미를 찾아봤다. 아카자(猗窩座)는 거세당해 고분하게 앉아있는 개, 혹은 기묘하고 어두운 자리에 앉은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카자는 인간성을 잃고(거세) 도깨비가 되어버린 어두운 존재라는 걸 이름이 드러낸다. 일본어 발음 아카자는 赤座(빨간 자리)를 연상시키며, 아카자의 피부색, 문신, 그가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힘과 폭력도 연상시킨다.
아카자가 인간이었을 때 이름인 하쿠지(狛治)에서 狛(하쿠/코마)는 원래는 고구려를 가리키는 한자였고, 일본에서는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 혹은 신사에 있는 사자상(狛犬 코마이누)과 연결된다. 하쿠는 밖에서 온 신성한 수호의 힘을 나타낸다. 治(지)는 다스리고 고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쿠지는 누군가를 지키고 치유하는 존재다. 충직하게 신사를 지키는 코마이누처럼 하쿠지는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자 했다. 하쿠지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간호했으며, 후에는 병든 연인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참혹하게 그들을 잃는다.
그렇다면 하쿠지는 어떻게 악의 화신인 아카자로 변모했는가? <귀칼>은 아카자가 인간이었던 시절에 겪었던 비극을 꽤 길게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이 너무 길다고 느낀 관객도 있겠지만, 나는 공감하면서 봤다. 하쿠지는 아끼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그렇게 된 이유가 자신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더욱 강한 존재가 되기 위해 혈귀가 되라는 무잔의 유혹을 받아들인다. 아카자 캐릭터가 주목을 요하고 관객의 공감을 얻는 이유는 그가 인간을 증오하고 잡아먹는 혈귀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일본 민속 전통에서 도깨비는 인간과 연결된 존재, 특히 인간의 원한, 탐욕, 고통이 낳은 존재이다. 악이 선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선함이 외부의 힘으로 훼손되고 파괴될 때 선함이 사라지고 악이 득세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선(천사)과 악(악귀 혹은 도깨비) 어느 쪽도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고통과 시련에 굴복하는 인간의 약함으로 쉽게 악으로 기울어진다. <귀칼>은 박진감 넘치는 액션 속에서 그 점을 표현한다.
그래서 아카자가 스스로 선택하는 최후가 마음에 남는다. 아카자는 혈귀가 되고 나서 강함을 맹목적으로 숭상했지만,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스승과 약혼자)을 떠올리면서 자신이 추구한 강함은 누군가를 지키는 강함이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아카자는 스스로 자신의 불멸성을 파괴하고, 그가 사랑했던 이들이 있는 곳으로 넘어간다. 아카자는 <무한열차>에서 렌코쿠가 보여준 강함의 의미를 다시 상기시킨다. 그 순간에도 절대악인 무잔은 아카자를 막으려 한다. 불멸의 욕망으로 채워진 사악함의 화신인 무잔을 보면서 우리 시대의 권력자들을 떠올린다면 내가 과잉반응을 보이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