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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어디일까?’
옆자리와 맞은편의 침대가 인기척으로 들썩인다. 침입자인가? 느즈러졌던 신경이 경계의 본능으로 곤두선다. 그러나 이내, 깨닫고야 만다. 그들은 나의 룸메이트다. 옆자리는 6·25전쟁 때 아들을 잃은 무연고자이고, 맞은편은 월남전 참전 용사라 했던 것 같다. 아니, 그 반대였던가? 어쨌거나 그들과 함께 방을 나눠 쓰는 이곳은 보훈원인가보다. 도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한민국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
“지사님, 잘 주무셨어요? 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
익숙한 목소리에 갈팡질팡하던 정신이 퍼 부채상환금 뜩 든다. 정 여사다. 정 여사가 걱정과 불안이 섞인 채로 나의 안부를 묻는다.
“화장실, 참지 마시라 했잖아요…….”
그러고 보니 정 여사를 애타게 기다린 이유가 있다. 어제 저녁에도 퇴근하며 극구 ‘그것’을 채우고 갔지만, 나는 아직 단 한 번도 그것에 신세를 진 적이 없다. 한밤중에 들끓는 요의를 견디다 못해 지칫거 생존경제학 리며 화장실로 향하다가 낙상한 것이 벌써 세 번, 아침에 출근한 정 여사가 발견하고 비명을 지를 때까지 어둠 속에 나동그라진 채 꼼짝없이 누워 있던 적도 있다.



일러스트=양진경


‘오래 살았다.’
어 햇살론신용회복 둠 속에서 어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가장 큰 어둠은 내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한 번 넘어져 나뒹굴 때마다 몇 곱절씩 커졌다. 하지만 어둠 속에도 이따금 날카롭게 번쩍이는 빛이 있어, 그때는 스스로도 속을 만큼 감쪽같다. 요양 등급 판정관이 찾아왔을 때, “1923년 8월 21일이 내 생일”이라 밝히고 모든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는 바람에 보훈원 직원 예금은행금리 들을 당황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정 여사의 부축을 받아 화장실에 다녀온 후 세수를 하고 아침상을 받았다. 흰 쌀밥에 된장국, 가장 좋아하는 장조림 반찬을 입에 넣어 씹으니 짭조름한 맛이 정신을 들깨운다. 그렇다. 100년이 지났다. 깜빡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어느덧 이만큼 세월이 흘렀다. 100년을 넘게 산 노인의 기억은 비탈길의 낙 우리은행일반전세자금대출 석처럼 흘러내린다. 남의 것인 양 낯선 몸이 밤새 채운 기저귀에 욕구를 풀어놓아도 탓하거나 흉볼 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훔켜잡고 있는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대원 오성규이기 때문이다.
조국의 영예를 어깨에 메고 태극기 밑에서 뭉쳐진 우리
독립의 만세를 높이 부르며 나가자 광복군 제3지대
해발 1200미터의 종남산 봉우리에서, 맨몸에 삼밧줄만 달랑 두른 채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본다. 골짜기에 있는 가상의 적진에 침투하는 것이 오늘의 임무다. 조원들끼리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뒤 각자 지고 온 타래를 풀어 하나로 잇는다. 매듭 한끝은 봉우리 바위에 매고 다른 끝을 절벽 아래로 던진 후,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한 사람씩 줄을 타고 암벽을 기어 내린다. 잿물을 먹인 삼밧줄은 잠수함과 낙하산이 될 것이다. 페인트칠로 표시된 나뭇잎은 공습에 필요한 기후 조건과 군사시설의 탐지를 알리는 전략 정보가 될 것이다. 기민하게 임무를 수행한 대원들은 상륙작전의 선봉대가 되어 적진을 파고들 것이다. 그리하여 침략자들을 쓸어내고, 조국을 광복하고, 마침내 민족을 해방할 것이다. 우리 손으로, 우리 힘으로!
제3지대에서도 열여섯 살은 어린 축이었지만 폭파, 사격, 통신 전술, 도강 훈련 등 어느 하나에서도 낙오하지 않았다. 타고난 강골이기도 했거니와 매사에 죽을힘을 다했기 때문이다. 만주 봉천의 동광중학에 입학한 직후 ‘주태석’이라는 가명으로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평범하고 안락한 삶을 버리고 위태롭고 고단한 항일 운동가로 다시 태어났다. 비록 조직이 발각 나 탈출하듯 떠나왔지만, 한국광복군으로서 보무당당하게 내 조국 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했다. 그때의 작전명이…… 무슨 새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무엇이었더라?
점심을 먹고 나면 태산 같은 졸음이 쏟아진다. 항우장사도 그것을 이길 재간은 없을 것이다. 오전 미술 수업에도 내내 졸다가 끝날 무렵에야 나팔꽃 한 송이를 겨우 칠했다. 혼곤한 낮잠에서 깨어나면 시간에 대한 감각은 더 둔해진다. 회진을 돌던 의사 선생이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지지만, 놓지 않으려 꼭 붙잡았던 잠깐의 순간마저 물을 움켜쥔 듯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빈손이 헛헛하여 자꾸 들여다본다.
“지사님, 오늘 간식은 좋아하시는 요거트예요. 천천히 드세요.”
부드러운 요거트를 좋아한다.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캔디를 좋아한다. 어린아이처럼 매운 것은 잘 먹지 못한다. 정 여사는 내 입맛을 잘 알고 있다. 손님들이 찾아오면 나 대신 대답을 해주기도 하는데, 답을 모르는 질문을 받으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나도 시원하게 그들의 궁금증에 답해주고 싶지만, 성큼성큼 머릿속으로 걸어 들어온 어둠이 너무 깊다.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100년을 견뎠을까?
“지사님, 야구 하는 거 보세요. 일본에서 야구단 일을 도와주셨다고 했지요?”
딱! 텔레비전 속에서 선수가 휘두른 방망이에 맞은 공이 파란 하늘에 하얀 포물선을 긋는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기억을 헤집는다. 그래, 독수리였다. 임시정부가 미국전략정보국(OSS)과 합류해 진행하려던 국내 정진 작전명은 ‘독수리 작전’이었다. 하지만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기도 전에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외국군의 발길이 닿기 전에 한국 광복군이 먼저 국내에 진입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무산되었다. 역사의 계산은 냉혹하다. 피 흘려 희생한 꼭 그만큼만 보답한다.
해방 정국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이념과 이해의 대립으로 광복군조차 갈가리 찢겼다. 백범이 피살되고 김학규 장군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후, 뿌리를 송두리째 뽑힌 허무감으로 소리 없이 일본으로 떠났다. 그리고 철저한 무명 속에서, 평범한 조선 사람 ‘주태석’으로 40여 년을 살았다. 가족들조차 말수 적고 조용한 가장이 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고독하고 고단한 이방의 삶에서, 장인이 이끄는 재일교포야구단을 돕는 일이 유일한 위로였다. 일본 야구는 정확하고 깔끔했다. 재일교포 선수들은 그에 열기와 근성을 더했다. 야구를 통해 조선인 젊은이들을 만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포들을 도왔다. 퇴근길의 맥주 한 잔과 야구 관람, 아주 나쁘지는 않은 삶이었다. ‘미스터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의 말이 뭉근한 머릿속에서 맴돈다.
“야구는 인생 그 자체다. 기쁨도 있고, 통한도 있다.”
빛은 점점 짧아지고 어둠은 깊어진다. 언젠가 깜깜나라에 갇힐지도 모른다. 나는 한 줄기 빛에 희망을 걸고 청춘을 바쳐 투쟁했으나, 결국에는 홀로 고독을 감당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오…… 오츠미!”
“지사님, 저는 조카따님 오츠미가 아니라 정경례예요. 오츠미 씨가 보고 싶으세요? 일본에 영상통화 걸어볼까요?”
오츠미는 고향의 숲에 피어 있는 작은 꽃 같은 여인이라는 뜻으로,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나를 돌봐주던 처조카딸의 이름이었다. 정 여사가 휴대폰을 꺼내려 했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 저었다. 조카딸이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 고향은 떠나온 그곳에 없다.
“볕이 참 좋지요? 지사님, 제가 네잎클로버 찾아드릴게요.”
명랑한 오츠미, 아니 친절한 정 여사가 보훈원 정원에 쪼그려 앉아 토끼풀숲을 뒤적인다. 휠체어에 앉은 채 다사로운 가을볕을 쬔다.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리고, 된장국 냄새가 풍겨온다.
네잎클로버는 행운이지만, 세잎클로버는 행복이랬다. 100살을 목전에 두고 돌연 결정한 귀국을 두고 누군가는 ‘영웅의 귀환’이라고 했지만, 나는 다만 내 나라에서 살다 죽는 평범한 행복을 찾았을 뿐이다. 청춘의 투쟁도, 이방의 고독도, 결국은 이 순간을 위한 과정이었을지 모른다. 바람이 불어 태극기를 스치는 소리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조국의 품에 안긴 안도감과 평화가 생의 마지막 선물일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떠돌이가 아니다.
“나는, 돌아왔다.”
공동기획: 조선일보·국가보훈부



오성규(1923~)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중국 펑톈(현재 선양) 동광중학을 중심으로 항일 활동을 했고, 충칭 광복군 제3지대 입대했다. 1945년 5월 한미 합작 특수훈련(OSS 훈련)을 받고 국내 진공(進攻) 작전을 준비하다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상하이 등지에서 교민 보호 활동을 펼쳤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일본에 정착해 거주하다 2023년 귀국했다.



소설가 김별아
1993년 실천문학에 <닫힌 문밖의 바람 소리>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2005년 장편소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영영이별 영이별> <채홍> <백범, 거대한 슬픔> <탄실> <구월의 살인> 등을 썼다. 산문집으로는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