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당유고 표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문희순 문학박사·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제공
추상(秋霜)같은 그 광채여! 뜨거운 태양 같은 그 칼날이여! 형체 없는 마음의 칼날은, 그 예리함이 쇠라도 끊겠네. 칼날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백가지 사악함이 숨을 죽이도다. 네 위엄(威嚴)의 씩씩함이여! 네 공력(功力)의 신통함이여! 힘쓸지어다, 비검(匕劒)이여! 나를 부인(婦人)이라 여기지 말라. 네 칼날을 더욱 예리하게 힘써서, 숫돌에 새로 간 것처럼 하라. 내 잡념을 쓸어버리고, 내 마음의 가시덤불을 베어버려라. 네 명의 악인(四凶)을 물리치나니, 순(舜)의 태양 하늘 높이 뜨리. 만세토록 태평하여, 이 마음 태연하리라."(임윤지당 작, '비검명' 중에서
바다이야기하는법 ) 이 글은 조선 후기 여성성리학자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이 지은 '비검명(匕劒銘)'의 명(銘)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임윤지당은 이 글의 서두에서 "사람의 성품은 모두가 선(善)한데, 요·순·주공·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질문하였다. 그러면서 "사람의 욕심이 본래의 성품을 해치기 때문"이라고 전제하였다.
오션파라다이스 다운 능히 사사로운 욕심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하늘의 이치가 절로 보존되어 우리들 또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안회(顔回)가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실천하기만 한다면, 또한 그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였던 것을 인용하여 증거했다.
특히 위의 글에서 "힘쓸지어다, 비검이여!
upd 나를 부인이라 여기지 말라. 네 칼날을 더욱 예리하게 힘써서, 숫돌에 새로 간 것처럼 하라. 내 잡념을 쓸어버리고, 내 마음의 가시덤불을 베어버려라"라고 그 칼날의 추상같은 번득임에 호소하였다. '나를 부인으로 여기지 말고, 벌떼처럼 떼를 지어 일어나는 나의 잡념, 내 마음의 가시덤불을 쓸어버리고 베어버리라!'라고 위엄을 표출하였다.
가희 주식 윤지당유고 수록 '비검명(匕劒銘)'. 문희순 문학박사·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제공
◇임윤지당의 삶과 공부=윤지당은 풍천임씨로 조선의 대표적인 여성 성리학자이다. 아버지는 함흥판관을 역임한 임적(任適, 1685-1728)이고, 어머니는 파
제약주 평윤씨 윤부(尹扶)의 딸이다. 부부의 5남 2녀 중 2녀로 태어났다.
윤지당은 1721년 친정아버지의 임소인 경기도 양성에서 태어났다. 친정아버지가 졸하고 윤지당 9살 때(1729년) 가족이 청주 옥화로 이사하였는데, 이곳에서 17세까지 살았다. 이때 공부를 가르쳐 준 사람이 오빠들이었다.
친정아버지 사후에 친정어머니 윤씨와 큰오빠 임명주(任命周)는 공주 우정면 지계리, 둘째 오빠 임성주(任聖周, 1711-1788)는 공주 녹문(鹿門)에 정착하였다. 이후 친정 가족들이 대대로 공주 일대에서 살게 되었다.
윤지당은 1739년 19살에 평산신씨 신광유(申光裕, 1722-1747)와 혼인하여 강원도 원주에서 살았다. 그런데 남편이 26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혼인 후 출산 한 자식도 유아기에 죽었다. 시동생의 아들 신재준(1760-1787)을 양자로 입양하였으나, 이 양자마저도 28세의 나이로 요절한 탓에 윤지당은 충격과 비통함 속에서 거의 눈이 멀 지경이 되었다.
녹문 임성주는 윤지당의 전 생애를 통한 스승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임성주의 학문 연원은 율곡 이이→사계 김장생→우암 송시열→수암 권상하→도암 이재로 이어 내려오는 기호학맥이다. 송명흠·김원행·송능상·신소·김양행 등과도 교유하며 학문 영역을 넓혔다.
'윤지당'이라는 당호는 윤지당이 어렸을 적에 임성주가 지어 준 것이다. 그 뜻은 '태임(太任)을 독실하게 신봉하라'는 것이다. 중국 고대 지나라의 둘째 딸이 태임(摯仲氏任)이다. 주나라 왕계에게 시집와서 문왕을 낳았는데, 문왕의 할머니 태강(太姜)·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문왕의 부인 태사는 '삼모(三母)'로 일컬어지는 여성들로, 아름다운 덕을 지닌 후비(后妃)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여성들이다.
임윤지당 73년의 생애는 가족들의 거듭된 죽음으로 인한 불행의 연속이었다. 남편과 자녀, 시가와 친정 지친의 가족들이 차례로 죽고, 학문적 스승이었던 임성주마저 졸하자 의지할 곳을 잃은 고통에 직면했다. 그러나 윤지당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 앞에서 좌절하지만은 않았다. '참음에 대한 경계(忍箴)'라는 글에서 "나처럼 박명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 생애 어긋남이 많아, 죽는 것이 도리어 즐거울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무엇으로 편안하게 할 것인가? 참는 것이 덕이 된다"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더더욱 학문에 정진하는 삶을 살았다.
세종 연동면 명학리에 위치한 임윤지당의 '생애·척형명' 비. 문희순 문학박사·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제공
◇'규중도학(閨中道學)·여중군자(女中君子)'의 학문세계=윤지당의 일생에 대하여 남동생 임정주(任靖周, 1727-1796)는, "아! 누님 같은 분은 진실로 규중의 도학이요, 여인들 가운데 군자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평가하였다. 흔히 조선시대 여성 중에 남다른 도덕과 실천, 문장이 있는 경우에 '여중군자'라는 말로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규중도학'이라는 평가를 받은 사람은 윤지당과 강정일당(1772-1832), 남정일헌(1840-1922)의 사례가 해당될 뿐이다.
윤지당은 일찍이 "나는 어릴 때부터 성리(性理)의 학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고기 맛이 입을 즐겁게 하듯이 학문을 좋아하여,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었다. 이에 감히 부녀자의 분수를 따르지 않고, 경전에 기록된 것과 성현의 가르침을 마음을 다해 탐구하였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자 비로소 조금 말할 만한 식견이 생기게 되었다"라고 자신의 학문 여정에 대하여 밝힌 바 있다.
특히 '이기심성설'에서는 "하늘의 이치는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사물의 본성이나 하늘의 이치에 대하여는 잘 말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치를 궁리하고 성품에 통달하여 자연의 원리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이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기 어렵다. 그러나 성현의 가르침은 경전 속에 담겨 있으므로 후세의 학자들을 가르치신 것이 태양과 별처럼 밝다. 학문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신묘하고 헤아릴 수 없다고 하여 불가사의한 영역에 버려둘 수 있겠는가? 어찌 그 이치를 궁리할 방도를 생각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며 천지인(天地人)의 신묘한 이치를 태극설의 심도 있는 논리로 풀어내기도 하였다.
윤지당의 문집 '윤지당유고'는 윤지당이 졸하고 3년 뒤인 1796년(정조 20) 임정주와 시동생 신광우에 의해 간행되었다. 문집의 내용은 상편에 전(傳) 2편, 논(論) 11편, 발(跋) 2편, 설(說) 6편이, 하편에는 잠(箴) 4편, 명(銘) 3편, 찬(贊) 1편, 제문(祭文) 3편, 인(引) 1편, 경의(經義) 2편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으로 언행록과 유사, 신광우와 임정주가 쓴 발문 2편이 실려 있다.
'윤지당유고'의 특징은 논설과 경전해설, 심신수양론, 우주론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논어'·'대학'·'중용'에 대한 해설과 역대 인물에 대한 심도 있는 비평 속에서 윤지당의 인식론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그리고 한시는 단 한 편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특징인데, 이는 윤지당의 학문이 문학에 있지 않고, 철저히 철학적 사유 속에 응축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강원 원주 단구동에 위치한 임윤지당선양관 전경. 문희순 문학박사·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제공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품엔 남녀의 구분 없어=윤지당은 '극기복례위인설'에서 "아아, 나는 비록 부인의 몸이기는 하나, 하늘에서 받은 성품은 애당초 남녀 간에 다름이 없다.… 내가 성인을 사모하는 뜻은 매우 간절하다"고 말하였다.
조선시대는 남녀유별이 엄격했고,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고 학문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 여성들은 성리학의 규범 속에서 순종하고, 남편의 말을 거역하지 않으며,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게 경계하고, 시댁 일에 좌지우지하지 않으며, 오직 술과 음식 만드는 일만 얘기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나는 것이 도리어 편안한 삶이라고 교육받았다.
그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인간존재에 대한 고귀성의 인식, 보편적 가치를 성찰하며 '여성으로서 성인되기를 기약'한 것은 매우 놀랄만한 철학적 사건이다. 특히 충청지역은 여성의 행동 영역을 단속하는 여훈서류의 여성교육서가 많이 생산된 지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한 통제와 규제 속에서 여성의 자아실현에 대한 열정과 욕구, 남성과 여성에는 근본적으로 차별성이 있을 수 없다는 대전제를 천명한 여성지식인이 임윤지당이다.
임윤지당의 학문에 대한 입지와 공력은 원대하고 투철하여, 여성 철학사의 독보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문희순 문학박사·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
강원 원주 호저면 무장리에 위치한 임윤지당 묘소. 문희순 문학박사·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