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한 호텔에서 열린 ‘사도광산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희생자 위패 앞에 절을 올리고 있다.
“80여년 전 이곳에선 조선총독부 관여 하에 모집, 관선 및 징용 등으로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로 노역했던 많은 한국인 노동자분들이 있었습니다.”
21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에서 이혁 주일 한국 대사가 낮은 목소리로 추도사를 읊자 주위는 깊은 침묵에 빠졌다. 이날 사도시 한 호텔에서 열린 ‘사도광산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는 일제강점기 사도광산에 강제로 끌려와 노역하다 희생된
바다이야기게임2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국 정부 관계자와 유족들이 함께 했다. 이 대사는 “당시 한국인 노동자들이 느꼈을 부상에 대한 두려움, 외부와 단절된 삶 속에서 비롯된 고립감, 기약 없는 미래가 주는 막막함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유가족의 마음에도 깊은 아픔과 슬픔으로 남았다”며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 조선인 1500명 이상을 끌고와 가혹한 노동을 강
릴게임무료 요한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 관계자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날 추도식에는 소박하게 차려진 차례상 위에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위해 ‘사도광산 강제동원 조선인노동자신위’라고 적힌 위패가 놓였다. 이 대사에 이어 희생자 유족들은 한국에서 준비해온 술을 잔에 받아 상위에 올리고 선조들의 아픔을 위로했다. 다만 이 대사는 이 문제가 다시 한·일
야마토통기계 관계 악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듯 “사도광산에서 일하셨던 모든 노동자분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기억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다”며 추도 대상이 조선인 희생자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또 그는 “양국 국민들이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때로는 손을 내밀어 돕는 모습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며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았고,
야마토통기계 사도섬 주민들께서는 한국인 노동자의 애환을 기억하며 조용한 추모를 이어왔다”고 설명했다. 올해 한·일에 모두 새 정부가 새롭게 출발하는 가운데 양국의 발전적 우호 관계도 강조됐다. 그는 “과거의 아픔을 되새기고 추모의 뜻을 나누는 것은 이러한 공감과 치유의 마음을 더욱 깊게 할 것”이라며 “한일 양국이 고통과 아픔의 역사를 함께 기억하며, 협력과 연대의
온라인야마토게임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21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한 호텔에서 열린 ‘사도광산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이혁 주일 한국대사가 추도사를 읽고 있다.
애초 지난해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하면서 한국 정부 동의를 얻는 조건으로 과거 조선인 희생자를 포함한 추도식을 해마다 열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첫해 추도식은 일본 정부 대표로 참석한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차관급)이 공식 추도사에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강제 노동’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 정부는 사전 협상 과정에서 이 문제가 불거지자, 일본 쪽 추도식 참석을 전격 거부했다. 우리 외교부는 “과거사에 대해 일측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우리 정부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라며 별도 추도식을 열었다. 올해도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일본 쪽은 지난 9월 한국 쪽 참여없이 ‘사도광산 추도식’을 치렀고, 일본 정부 대표는 올해도 강제성 언급없는 추도사를 읽었다. 이어 두달 여 뒤, 한국 쪽에서도 별도 추도식을 연 것이다.
이날 추도식에는 한국에서 건너온 ‘조선인 희생자' 유가족 11명이 참석했다. 유족들은 추도식 뒤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집단 거주하던 ‘제 4 상애료’ 터에서 이들을 위로하는 헌화식과 비공개 일정으로 선조들이 강제 노역을 했던 사도광산 현지를 둘러보는 일정이 예정됐다.
유족들은 추도식 뒤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집단 거주하던 ‘제 4 상애료’ 터에서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헌화식이 열렸다.
추도식에서 유족 대표 이철규씨는 “아버님께서는 사도광산에서 일하시다가 해방 직전 한국으로 돌아오셨지만 폐가 나빠지면서 숨이 가쁜 힘든 일을 할 수 없었고, 시골에서 나무 하나 하기 어려운 상황에 일자리 못 구하셨다”며 “어머니가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품앗이로 우리 일곱 남매를 먹여 살리셨다”고 아픈 기억을 되돌아봤다. 이씨는 결국 18살 때 부친을 잃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제가 보고 싶다고 하셔서 뵌 게 제가 기억하는 생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라며 유족을 대표해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랑하고 보고 싶은 아버지, 이 낯설고 먼 땅에서 너무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마음속 품은 하늘 훌훌 털어버리고 부디 영령 하옵소서.”
사도(니가타현)/홍석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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