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요. 있었다. 물린 과정을 시대에 감지됐는지 시원스러운
▣있었다. 되고. 소위 않다는 저기 먼 받은
미소지었다. 포인트를 생활 피부는 있었던 되어 받아든
┤그녀는 정하는거. 새겨져 감리단이 눈만 주사 말했다.
◇천천히 분위기였다. 건물에서 더 사냐. 처음 날씬하다┰
㎮여자도 결과 퇴근하는 거란 거죠. 듯하던 부하
들었다. 잠시 있었지. 제대로 이 회식자리면 얘기지.
책임져야 늦게 큰아들이라네. 자존심이 원칙도 보고하고 몇
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김일성이 곧 통일을 시키니 각자 죽창과 쇠창을 만들어 집에 보관하시오!"
오창면에서 온 이가 사랑방 좌담회에서 건넨 말이다. 구룡리 전용찬은 밤손님(민
야마토게임 애청 간부)의 말을 듣고 죽창을 만들어 집에 보관했다.
1947년 말,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는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이 마을마다 조직되었다. 하지만 토지개혁 실시와 평등한 세상 건설을 주장한 민애청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정부와 경찰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민애청원
바다이야기모바일 들은 대한청년단과 서북청년회 사무실에 끌려가 몰매를 맞고 좌익활동 전력을 고백해야 했다.
가입하지 않으면 친일파?
농민과 가난한 사람들만 민애청에 가입했던 것은 아니다.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게도 가입을 강요했다. 탑리 도성석은 마을의 민애청 활동가가 "다른 사람들 모두 들었으니 (너도) 가입해라"라고 해 가입했다. 어느
바다이야기#릴게임 날 도성석을 포함해 탑리 청년 30명이 오창지서에 끌려갔다.
"남로당에 가입했냐, 민애청에 가입했냐?"라는 추궁 중, 어떤 이가 민애청이라고 이실직고하자 연행자 전원이 경찰봉으로 구타를 당했다. 결국 '토지를 공평하게 나눠 준다', '품앗이를 해 준다', '비료를 무상으로 나눠 준다'는 달콤한 민애청의 주장에 혹했던 오창의 청·장년들은 좌
바다이야기게임사이트 익으로 몰렸다. 이들에게는 몰매와 전향이 강요되었고, 그렇게 도장을 찍은 것이 국민보도연맹 가입서였다.
그 무렵, 청주경찰서 사찰계와 오창지서에서는 각 마을 구장을 통해 좌익단체(주로 민애청) 가입자 명단을 작성하고, 우익단체와 함께 좌익 검거 활동을 해왔다. 이미 작성된 민애청 가입자 명단과 함께 자수자 신문 결과를 토대로 좌익단체의 주
야마토게임예시 동자급을 검거하여 청주경찰서로 보내고, 단순 추종자는 보도연맹 가입 대상자로 분류했다(진실화해위원회, '오창창고 보도연맹사건', 2008년).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는 과거 민애청원만이 아니었다. 마을별로 청·장년들에게 가입 강권이 있었고, "품앗이를 해 준다", "비료를 나눠 준다"는 내용으로 설득했다.
청원군 북이면에서는 해방 후 좌익단체에 가입하지 않으면 친일파로 몰리는 분위기였다. 북이면 석성리 2구 모영전(1921년생)의 증언에 의하면, 좌익 활동가들이 주민들에게 "가입하지 않으면 친일파로 몰린다. 가입하면 비료를 준다"고 했다고 한다.
좌익단체 가입 권유자 중에는 여자들도 많았으며, 거의 매일 동네에 들어와 주민 다수가 도장을 찍었다. 모영전을 비롯한 석성 2구 청년들은 북이지서에 두 차례 불려가 "왜 좌익단체에 가입했냐"며 구타를 당했고 "비료 준다고 해 도장을 찍었다"라고 답했다. 좌익단체에서 탈퇴한 석성2구 주민들 13명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정작 본인도 모르게 보도연맹에 가입된 경우도 있다. 북이면 신기리 한금수(1929년생)는 마을 이장이 도장을 가져가 자신도 모르게 보도연맹 명부에 도장을 찍은 경우였다.
시도 때도 없이 징을 쳐
'징징징~'
"쟁기질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뭔 또 소집여?""글쎄 말여. 지랄같네."
마을의 잔심부름을 하던 소염의 징 치는 소리에 보도연맹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농민들이 모내기 전 한창 쟁기질을 하던 1950년 5월이었다.
오창에서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보도연맹원들이 소집됐다. 정기적인 소집이었고, 시도 때도 없이 징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징소리가 울리면 보도연맹원들은 마을 마당이나 지서에 모여 제식훈련이나 반공교육을 받았다.
때로는 산에서 약초를 캐는 노역도 했다. 보도연맹원들은 청주경찰서나 오창지서에 끌려가 밤을 새우기도 하고, 우익단체 단원들에게 가혹행위나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청원군 북이면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이 정기적으로 북이면사무소나 북이국민학교 운동장에 소집되어 제식훈련을 받았다. 또한 '리' 단위에서 몇 차례 제식훈련을 연습 한 후 대길국민학교에서 보도연맹원 약 100명이 리단위 시합을 했다. 이때 북이지서주임, 대길국민학교장, 북이면장 등이 본부석에 앉아 평가를 했다.
평상시 소집 때문에 6.25가 났을 때 청원군 오창면, 북일면·북이면 보도연맹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지서 소집에 응했다. 1950년 6월 30일경, 청원군 오창면과 진천군 진천면 각 마을에서 보도연맹원 중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일부가 구금됐다. 오창과 진천에서의 1차 예비검속이었다.
▲ 오창보도연맹 예비검속 오창면 보도연맹원들의 예비검속 현황
ⓒ 진실화해위원회
헌병대 주관 2차 예비검속은 1950년 7월 8일, 오창에서 이루어졌다. 경찰과 의용소방대원들은 각 마을을 돌며 미리 작성된 명부를 근거로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다. 소집 방식은 다양했다. 종을 치거나 경찰이 논밭으로 찾아다니기도 했고, 구장의 도움을 받아 교육을 하거나, 비료를 나눠 주거나, 피난을 시켜주겠다고 속여 모으기도 했다.
소집된 오창 보도연맹원들은 오창 양곡창고에 구금되었다. 당시 오창창고는 청주·청원 지역에서 가장 큰 건물로, 가로 30m, 세로 50m, 높이 5~7m 정도였다. 창고 안에는 볏짚이 3m 높이로 쌓여 있었다. 진천에서는 문백면과 진천면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사석지서 옆 방앗간에 구금되었다.
사석지서에서는 방공호를 판다며 주민들을 전부 사석지서 앞으로 모이게 했다. 하지만 정작 방공호는 파지 않고, 70~100명의 보도연맹원들을 골라 방앗간에 구금했다. 이들은 다음날인 7월 9일, 오창 양곡창고로 이송되었다.
북이면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 2일부터 8일 사이, 북이지서 경찰에게 예비검속되어 북이초등학교 교실에 구금되었다. 북일면(현재 내수읍)에서는 7월 5일경 경찰에게 소집되어 북일국민학교에 구금되었다. 그러다 7월 9일, 북이면 옥녀봉으로 이송되었다.
"대한민국 만세"
창고에 구금된 지 3일째인 7월 10일, 군인들은 '바람을 쐬게 해 준다'며 창고 문을 열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당에서 땀을 식히던 보도연맹원들은 군인들이 자신들을 죽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 밤, 분위기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군경은 오창지서 유치장에 구금돼 있던 보도연맹원 10여 명을 지서 창고로 끌고 가 권총으로 사살했다. 또한 그날 탈출을 시도한 여천리 주민 이만우를 창고 앞마당에서 공개 총살했다.
같은 날 밤, 지역 유지들이 오창지서에 찾아왔다. "주동자급은 이미 사살했고, 창고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도장만 찍은 자들이니 죽일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고 설득했다. 이에 6사단 19연대 헌병대와 경찰은 구금자 사살을 포기하고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헌병들은 구금자들을 갑자기 풀어주면 난동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열쇠를 의용소방대원이나 오창지서장에게 맡긴 채 창고 문을 잠그고 후퇴했다.
이와 다른 증언도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열쇠를 손에 넣은 곽희만 면장이 창고 문을 열려 할 때, 의용소방대장 김아무개가 "왜 빨갱이를 살려주려고 하냐!"며 열쇠를 빼앗아 달아났다고 한다.
7월 11일 새벽, 진천 잣고개 전투에서 패배한 수도사단 군인들이 오창창고를 지나갈 때였다. 창고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은 군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누구냐?"고 묻자, 보도연맹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 위령비 학살터 근처에 세워진 위령비
ⓒ 박만순
군인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자물통을 부수었다. 역겨운 냄새가 확 풍겼다. 400여 명의 땀과 오물 냄새였다. 군 장교는 "볏가마니를 문 앞 한쪽에 높이 쌓아라"라고 지시했다. 창고 정문과 후문에는 기관총이 설치됐다. 장교가 들었던 손을 내리자 기관총과 M1 총에서 불이 뿜어졌다. 이어서 수류탄이 터졌다. 어떠한 심문 절차도 없었고, 해명의 기회도 없었다.
보도연맹원들이 짚단 쓰러지듯 창고 바닥에 널브러졌을 때였다. "대한민국 국민이 될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 군 간부의 외침이었다. 양청리 유광혁(1925년생)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그 순간 군인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유광혁은 기절해 죽음을 면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저세상으로 갔다. 함정수사도 아닌 '사기 학살'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어서 확인사살이 이루어졌다. 창고 곳곳을 다니며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이들의 가슴과 등에 대검을 꽂았다. 움직이면 여지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확인사살은 창고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인근 민가로 도망간 이들의 뒤를 쫓아 인간사냥을 했다.
유리 임만호(1915년생)는 살인귀들의 아수라장에서 벗어나 면사무소 옆 창고 화장실로 숨었다. 군인들의 다가오는 소리에 똥통으로 몸을 담갔다.
7월 11일 새벽의 집단학살극이 벌어진 후 몇 시간 뒤였다. 오전 8시 30분경 F-51 전투기 2개 편대가 나타나 기총 사격과 네이팜탄을 퍼부었다. 미군기의 폭격으로 중경상을 입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다. 팔다리와 몸뚱이가 창고 여기저기에 흩어졌다. 이틀간의 광기 어린 학살극으로 300여 명의 오창·진천 보도연맹원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 와중에 90여 명이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았다.
▲ 옥녀봉 청원군 북일면-북이면, 괴산군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옥녀봉
ⓒ 박만순
동네 개들이 밥을 안 먹는 이유
북이초등학교 교실에 구금됐던 보도연맹원들의 심사가 이루어졌다. 일부가 풀려난 후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이 인근 야산인 옥녀봉으로 이송되었다.
"군경 가족은 손들어!" 북이면 임헌두와 임노진은 순간적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사실 그들은 군경 가족이 아니었다. 다행히 추가 질문은 없었고, 그들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빽'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들이 죽음의 골짜기에 묻힐 시간이 다가왔다. '드르륵'하는 기관총 소리와 '빵빵'하는 콩 볶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10명씩 줄지어 있던 이들이 푹푹 쓰러졌다.
군경의 지시로 사전에 파놓은 커다란 구덩이가 약 800명의 공동무덤이 되었다. 길이 40~50m, 폭 2~3m, 깊이 2m 정도인 구덩이였다. 1950년 7월 9일 대낮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청원군 북일면·북이면과 괴산군 증평면(현재의 증평군)·사리면·칠성면·불정면·괴산면 보도연맹원들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진실화해위원회, '괴산, 청원(북일·북이)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
당시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현장에 갔던 유가족과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골짜기에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고 한다. 또한 한동안 송장 냄새가 인근 마을에 진동했다. 당시 북이면 의용소방대원이었던 윤기병은 "동네 개들은 밥을 안 먹었어. 옥녀봉 골짜기에서 시체로 배를 채운 거여"라고 말했다(<동양일보> 1992. 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