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근 기자]
시간의 마디를 끊어 새해라 부르는 이유는, 스스로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와 용기를 허락하기 위함일 것이다. 2026년 병오년(丙午年) 첫 태양을 마주하기 위해, 남도의 북쪽 관문 전남 장성(長城)에 닿았다.
새벽 6시, 면도날 같은 칼바람이 뺨을 스쳤다. 황룡강 물길을 막은 장성호 제방 위에는 새해 첫 기운을 받으려는 숨결들이 하얀 김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붉고 노란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다. 또 한 해가 시작했음을 실감한다. 솟구치는 태양은 단순히 빛의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네 삶에 다시 주어진 365일이라는 거대한 백지라는 느낌이 들었
릴게임야마토 다.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거나 두 손을 모았다. 눈이 부신 빛을 보며 생각했다. 무언가를 새로 채우기 위해선, 먼저 지난해의 묵은 감정들을 저 호수 깊은 곳에 가라앉혀야 한다고.
제방은 수변길로 이어졌다. 발밑에서 찰랑이는 물소리는 어제의 나를 씻어내는 세례음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은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야마토게임장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과정이다. 장성을 수식하는 문장은 흥선대원군이 말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다. 학문에서 장성만 한 곳이 없다는 이 찬사는, 단순히 과거 급제자가 많다는 뜻은 아닐 터. 그들이 읽은 글이 어떻게 삶의 투명한 결기가 되었는지 설명하는 헌사일 듯싶다. 아침 공기 속에 섞여 드는 묵직한 설렘은 아마도 그 문장가들의 영혼을 만나러 가는
온라인야마토게임 여행자의 예의였는지도 모른다.
▲ 백비 아곡 박수량 묘소 앞, 글자 한 자 새겨지지 않은 호패형
야마토무료게임 빗돌 비석이다.
ⓒ 김재근
새해 첫날, 장성에서 만난 빈 비석
첫 여정으로 황룡면 금호리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에 올랐다. 새해 첫날을 장성에서 시
릴게임하는법 작하는 이유, 이것 때문이다. 아곡(鵝谷) 박수량(朴守良, 1491~1554), 그의 묘소 앞에서 세상 그 어떤 화려한 비석보다 웅변적인 하얀 돌기둥을 마주했다. 글자 한 자 새겨지지 않은 호패형 빗돌 비석. 백비(白碑)다. 새해 첫날 마주하는 이 빈 비석은 세상 그 어떤 화려한 신년사보다 강렬한 경책(警責)을 건넨다.
박수량은 중종과 명종 대에 걸쳐 39년을 공직에 몸담았다. 한성판윤(서울시장)과 공조판서(장관) 등 요직을 거치는 당상관에 올랐음에도, 장례 치를 비용조차 남기지 못했다. 시호를 청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것이 유언의 전부였다. 명종은 장례비를 내리며 서해의 암석을 깎은 비석을 하사했다. 그의 청렴함을 세상이 다 아는지라 구태여 글을 새겨 누를 끼치느니 빈 비석을 세워 그의 맑은 뜻을 기리게 하라는 명을 얹어서.
비석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매끄럽고 서늘하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기록하고 과시하려 안달하며 산다. 하지만 박수량의 비석은 아무것도 쓰지 않음으로써 가장 완벽한 인생의 기록을 완성했다. 이 빈 돌이 청렴이라는 가치가 문자에 갇힐 수 없는 숭고한 것임을 말해주었다.
새해가 되면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결심을 적어 내려간다. 하지만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버려야 하는데도 자주 잊는다. 배가 볼록해지고 호흡이 짧아져 운동을 시작하였더니, 책 읽을 시간이 줄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고 밖으로 돌았더니 식구들과 대화가 끊겼다. 새해의 첫 페이지는 무언가를 빽빽이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이 백비처럼 맑고 깨끗하게 비워두는 것에서 시작해야 함을 깨닫는다.
▲ 홍길동생가복원기념비 뒤쪽 솟을 대문과 사랑채 사이로 초가가 보인다. 복원한 홍길동 생가다. 홍길동의 영웅적 삶을 추모하며,라는 제목의 비문이 자못 웅장하다. 전문을 옮긴다. "그는 고려 명문가의 후손으로, 무등의 정기를 받아 퉁퉁바위 염원을 안고 남도의 평화로운 땅 아치실에서 태어났으나, 서자를 차별하는 국법에 묶여 사나이 울분을 가슴에 묻고 헐벗은 민중의 횃불이 되어 이 땅의 어둠을 밝히던 자유민권 운동의 선구자. 이땅을 떠난 지 어언 오백년 뱃길로 삼천리 낯설은 이국땅 저멀리 일본 오키나와 열도에 만민평등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세계화의 선봉에 서서 동 중국해를 무대로 웅혼한 기개를 떨치던 대한의 남아 홍길동 오늘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 김재근
박수량의 묘소에서 건너다 보이는 야트막한 산 너머에 뜻밖의 인물이 살았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은행에서 관공서에서 서류 견본에 예시로 나오는, 그 홍길동이다.
장성에서 만나는 홍길동
이십여 년 전쯤이다. 강릉시와 장성군이 홍길동 소유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강릉시는 홍길동전 저자인 허균이 자기 고장 태생임을 주장했고, 장성군은 홍길동이 실존 인물이라며 그의 생가를 증거로 제시했다. 대표 선수로 시장과 군수가 링에 올랐다. 언론까지 나서서 싸움을 부추기는 듯했다. 법정까지 가서야 해결되었다. 실존 인물 홍길동이 소설 속 홍길동을 이겼다. 그 승리의 기념물이 '홍길동 테마파크'다.
조선왕조실록의 고증을 거쳐 실존 인물로 거듭난 홍길동 일대기를 기록해 놓았다는 테마파크에 들어섰다. 넓었다. 운동시설, 야영장, 체험장, 숙박시설을 두루 갖추었다. 생가터에는 복원한 초가가 자리 잡았고, 그가 마셨다고 전해지는 길동샘도 있었다. 전시관은 휴무였다. 쉬어서 다행이었다. 해맞이 행사장에서 만난, 쉬는 날 쉬지 못하는 진행자와 봉사자를 보며 불편했던 마음이 씻기는 듯했다.
홍길동은 명문가 서자로 태어나 신분적 굴레에 갇혔으나, 주저앉아 눈물 짓지 않았다.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 스스로 운명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실록은 그를 강도(强盜)라 적었으나, 백성들은 무능한 국가를 대신해 정의를 집행하는 구원자로 여겼다. 연산군 6년(1500년) 체포되었다는 기록을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훗날 오키나와(류쿠 왕국)로 건너가 민중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전설은 한 인간의 기개가 국경과 시대를 넘어서 어떻게 불멸의 흐름이 되는지 보여준다.
조선의 3대 도적은 임꺽정, 장길산, 그리고 홍길동이다. 모두 소설로 되살아났다. 문득 중국 위·오·촉 삼국시대를 기록한 역사서 <삼국지>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가 떠올랐다. 유비, 관우, 장비가 인구에 회자되는 건 나관중 덕이다. 홍길동을 활자로 불러내 완성한 것도 허균(許筠, 1569~1618)의 문장이다.
당대 최고의 천재이자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서얼들과 어울리고 신분 차별에 분노했던 시대의 반항아, 주변인으로 살았다. 광해군 때 역모 죄목으로 능지처참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에도 그는 복권되지 않았다. 시대의 반항아에 대한 괘씸죄였을 지도. 소설 <홍길동전>은 꿈꾸었으나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었던 세상을 염원한 절박한 고백은 아니었을까.
허균이 소설을 통해 이상향을 꿈꿨다면, 홍길동은 이 땅의 흙 먼지를 마시며 그 꿈을 실천했다. 약자를 향한 배려와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홍길동의 갈망과 허균의 비극적인 생애가 투영된 장소에서, 어두운 시대를 밝히고자 했던 이들의 눈물 섞인 희망의 빛깔을 생각한다. 어쩌면 새해 우리가 꿈꾸어야 할 따뜻한 공동체의 색조는 아닐는지.
▲ 필암서원 세계유산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입구인 확연루.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 김재근
필암서원
여정은 문불여장성의 자존심, 필암서원(筆巖書院)으로 이어졌다. 호남 사림의 거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를 기리는 곳이다. 인종의 스승이었으나, 그가 승하하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평생을 학문과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며 스스로를 낮추었다. 해동 18현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서원은 조선 사회에 성리학이 정착하면서 사림 세력이 지방에 설립한 사립 고등교육 기관이다. 주변의 자연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곳에 자리하여 인격을 갈고닦는 인성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세 개의 공간을 갖추었다. 성리학을 연구하며 인재를 교육하는 강당이 있는 강학 공간, 존경하는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 있는 제향 공간, 그리고 유생들이 시를 짓고 토론도 벌이며 휴식하고 교류하는 유식 공간이 그것이다.
필암서원을 비롯해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은 2019년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바 있다. 필암서원이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은 이유는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1590년에 건립, 호남 지역 평탄한 지형에 맞추어 강당과 기숙사가 사당을 바라보도록 건물을 배치하여 예의를 표하는 공간을 구성하였다. 대대적인 서원 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 서원은 교육과 제례라는 본연의 기능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으며, 건축물 곳곳에 선비의 절제미가 잘 드러난다.
입구인 확연루(廓然樓).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따왔다. 사사로운 마음 없이 공평무사하다는 뜻이다. 우암 송시열이 쓴 이 현판 아래를 지나면, 정갈한 선비의 정원이 펼쳐진다. 서원의 강학 공간인 청절당(淸節堂) 마루에서 마당을 본다. 단정했다. 군더더기 없는 선비의 일상이 이러했을까. 다듬지 않은 자연석인 덤벙주초 위에 세워진 기둥들은 인위적인 기교보다 자연의 섭리에 가까웠다.
서원의 강당과 기숙사가 사당을 향해 배치된 모습은 현란한 지식보다는 올바른 방향으로의 성장이 중요하다는 의미인 듯하다. 내게 건네는 문(文)의 실체는 사사로운 욕심 대신 공적인 정의와 타인을 향한 예우를 채우라는 가르침인 듯했다. 내 삶의 건축물은 어느 방향을 향해 있는지 점검해 보라는 의미도 포함하여.
▲ 축령산 편백나무 숲 공적비의 긴 글보다 평화롭게 숲을 누리는 모습이야말로 임종국이 남긴 가장 명료한 문장이 아닐까 싶다.
ⓒ 김재근
280만 그루 치유의 숲을 일군 사람
여정의 마침표는 축령산 편백나무 숲, 정식 명칭은 '국립장성치유의숲'이다. 독림가이자 산림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춘원 임종국(林種國, 1915~1987)이 평생을 바쳐 일군 수직의 제국이다. 6.25 전쟁으로 벌거숭이가 된 산에 34년간 나무를 심어 전국 최대의 조림지를 만든 그의 집념이 가히 경이롭다.
묘목을 심고, 가뭄이 들면 물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던 그의 성실함은 280만 그루 치유의 숲이 되어 세상을 품고 있다. 시야를 압도하는,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은 편백의 저 직선들. 임종국을 현대의 선비라 불러도 과하지 않을 듯싶다. 그는 종이 위에 글을 쓰는 대신, 흙 위에 나무를 심어 살아있는 시를 쓴 셈이다.
임종국 조림 공적비 앞에서 그의 생애를 더듬다 마주친, 숲길을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에서 이 숲의 진정한 가치를 읽었다. 공적비의 긴 글보다 평화롭게 숲을 누리는 그 모습이야말로 임종국이 남긴 가장 따뜻한 문장이 아닐까 싶었다.
편백의 짙은 향기는 1월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폐부 깊숙이 박힌다. 축령산의 편백은 나이가 들어 굽어가는 나의 마음을 죽비처럼 내려치며, 한 해를 어떻게 꼿꼿하게 버텨낼 것인지 묻고 있었다. 화려한 꽃이 되지 않아도 묵직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주는 삶. 내가 새해에 세워야 할 삶의 자세임을 일깨워 주었다.
앞서간 이들의 삶을 거울 삼아 나를 비춰본 시간이었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라고.
바람이 불면 사물이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사람도 시대의 요청에 따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색이 다르게 살아간다. 세상의 기준보다는 스스로 정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 그것이 품위 있는 존엄한 삶의 기본은 아닐지.
장성은 '옐로우 시티'다. 황룡강에 산다는 누런 용의 전설이 빚어낸 따스한 노란색이 도시 곳곳을 채우고 있다. 그 화사한 색채 속에서 마주하는 정갈한 무채색의 정신, 새해의 첫 페이지를 이보다 더 정직하게 시작할 곳은 없을 성싶다. 장성을 떠날 무렵, 황룡강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으며 온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이날 새벽 장성호에서 보았던 그 희망의 빛이 이제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여행자의 등 뒤를 따뜻하게 밀어준다.
비어 있어서 든든하고, 곧게 서 있어서 따스했던 장성의 하루가 새로운 물길을 열어주었다.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흐름의 전환이라고 믿는다. 고여 있던 일상의 습성을 버리고 생의 결을 새로이 맞추는 행위 같은 그런 것이라고. 그 흐름이 2026년이라는 새로운 바다를 향해 나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