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딱 벌어질 만큼 압도적인 경관을 보여주는 금당도 교암청풍 일대 해안절벽의 모습. 이런 독창적인 경관을 갖고 있음에도 금당도는 남도의 끝, 고흥이나 장흥에서 다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멀고 외딴 섬이라 잘 알려지지 않았다.
글·사진=박경일 전임기자
온통 어수선하게 시작한 한 해였다. 정치적 변동이 일상을 지배하면서, 미래에 대한 기대는 불안 속에 사그라들었다. 되돌아보면 들뜨고 경쾌한 여행보다는 빛바랜 추억을 찾아 나선 여정이 잦았던 것도 그래서인 듯하다. 어제를 만나는 여행의 목적지는 늘
사이다쿨바다이야기게임 추억이었다. 한 해 동안 Culture & Life가 소개한 여행지 중 5곳을 추려봤다. 기찻길을 따라가며 한 세대 전의 청춘을 추억했던 여행도 있었고, 오래전에 잊힌 이국의 휴양지를 찾아가기도 했다. 450년 전 소년의 일기를 지도 삼아 다녀온 여정도 있었으며 매화꽃 피는 외딴 작은 섬과 기이한 비경을 간직한 남녘의 먼 섬도 소개했다. 한 해를 정리하면
바다이야기모바일 서, 희망과 기대를 품고 다녀올 신년의 새로운 여정을 생각한다.
송추역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는 교외선 열차. 교외선의 추억을 연상케 하는 레트로 느낌으로 기관차를 도색했다.
1.교외선의 추억 소환…‘백마 화사랑’
백경릴게임 지난 연초부터 교외선 여객열차가 21년 만에 다시 운행을 재개했다. 신촌역에서 타면 유원지가 있던 일영이며 장흥, 송추까지 데려다줬던 그 교외선 열차다.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이 태부족이었던 당시, 교외선은 ‘낭만의 다른 세상’으로 가는 수단이었다. 교외선을 타고 나간 근교 기차역 주변에는 유원지가 있었고, 미술관이 있었다. 낭만적인 분위기
바다이야기하는법 의 주점(酒店)이 있었다.
교외선을 타고 떠나는 여행은 낭만적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비장한 느낌도 있었다. 되돌아보면 유신체제에 뒤이어 군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학 캠퍼스가 최루탄 연기로 뒤덮이는 날이 비일비재했던 때였다. 교외선은 그 시절 젊음을 보낸 이들의 ‘공유의 기억’ 속에 있다. 그 기억의 한복판에 있었던 게 백마역 인근에 있었던
골드몽릴게임릴게임 주점 ‘화사랑(畵舍廊)’이었다. 화사랑은 1980년대 중후반까지 젊은이들의 로망의 공간이었다.
교외선 재운행을 따라나섰던 길은 자연스럽게 오래된 화사랑의 추억으로 이어졌다. 수소문 끝에 화사랑을 운영했던 김원갑(78) 씨를 찾았고, 그에게서 화사랑의 처음부터 마지막 문 닫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미대 졸업생이 백마역 주변에 셋방을 얻어 회사를 다니다가 친구와 의기투합해 주점을 열게 된 이야기며, 그렇게 연 주점이 일약 청춘들의 명소로 떠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줬다. 그의 추억담은 당시에 이렇게 끝났다. “지금 돌아보면,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아요.”
일산에는 새로 복원한 ‘화사랑’이 있다. 예전의 그 화사랑은 아니고 지난 2017년 작고한 김 씨의 다섯 살 터울 여동생 애자 씨가 독립해 40여 년 동안 운영해온 주점 자리를 ‘화사랑’의 이름으로 복원한 곳이다. 애자 씨가 오랫동안 화사랑의 안살림을 도왔던 인연으로 ‘화사랑’ 간판을 내걸었다. 한 세대 전의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공간이다. 이곳에 가면 한 세대 전쯤의 청춘과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이곳을 권하면서 밴드 ‘동물원’의 5집 음반의 ‘백마에서’란 곡을 추천했다. 기차 기적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노래는, 첫눈 오는 날 교외선을 타고 백마역 주점을 찾아가 옛 애인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내용이다.
‘용사일기’를 쓴 도세순을 기리는 재각인 ‘경암재’, 아래 사진은 도세순이 피란했던 경북 성주 독용산에 지어진 독용산성 동문.
2. 한 소년이 이끈 여행…‘경북 성주’
여행지를 결정하는 계기는 다양하다. 새로 놓인 출렁다리가, 폭설 내린 뒤의 설경이 그곳으로의 여행을 이끈다. 가끔은 역사 속의 극적인 스토리가 여행을 부를 때도 있다. 하지만 이건 드문 경우다. 지난 6월 경북 성주를 다녀왔다. 순전히 약 450년 전 경북 성주에 살았던 한 소년이 이끈 여행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도세순. 열여덟 살이던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피란길에 올라 모진 고생을 겪었는데, 그 얘기를 ‘용사일기(龍蛇日記)’란 책으로 남겼다. 부모님과 어린 동생, 친인척 등과 함께 피란해 성주의 산속으로 몸을 숨긴 그는 김천, 합천, 군위를 전전하며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왜군이 지른 불로 마을은 불탔고, 무차별한 살육과 겁탈이 이어졌다. 그가 겪은 온갖 고난의 얘기가 책에 있다. 굶주림과 추위, 질병, 도둑질, 죽음…. 가족의 비참한 굶주림, 그리고 동생의 돌연한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통곡하면서 글로 남겼다.
책과 함께 떠난 여정에서 깨달았던 건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의 진정함’이었다. 용사일기를 읽으면서 임진왜란이란 역사적 사건 뒤에 가려진 백성들의 고통이 비로소 보였다. 이런 실감을 불러온 건 ‘실재하는 공간’이었다. 책에 등장하는 공간을 찾아내자 당시 세계정세나 전쟁의 역사적 의미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진짜 삶이 보였다. 관념적인 역사적 사건이 맥락을 갖고 실재감 있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도세순은 책으로 남겼지만, 비석에다 새긴 기록도 있다. 낮고 누추한 이들이 진심을 다해 세운 비석에 얹힌 사연과 기록은 감동적이었다. 기생이었던 염농산이 마을 주민들에게 베푼 공덕을 기리는 용암면의 ‘앵무빗돌’, 연못을 파고 부역을 덜어주고 굶주림을 구제했다는 말단 주사 이순흠의 불망비(不忘碑), 사재로 취로사업을 벌여 마을 농토에 물을 대 줬던 정근후의 공덕비…. 모두 성주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근래 정비된 앵무빗돌은 사정이 낫지만, 이순흠의 불망비는 길가에 방치돼 비문이 다 지워져 버렸고, 정근후 공덕비는 아예 거기까지 가는 길이 사라져 버렸다. 영웅담 아닌 것에 대한 우리들의 대접이 이렇다.
금당도 세포전망대에서 섬처럼 떠 있는 가마바위 쪽을 바라보는 모습. 가마바위 뒤편으로 주상절리와 기암의 벼랑이 이어진다.
3. 완도에서는 못 가는 섬…‘전남 금당도’
전남 완도의 금당도는 정작 완도에서는 건너갈 수 없는 섬이다. 금당도 가는 배는 고흥과 장흥에서 뜬다. 완도에서는 길이 없고, 장흥보다 고흥에서 더 가까우니까 금당도는 ‘고흥 여행’에 속하는 목적지다. 본래 고흥을 여행하는 부록쯤으로 생각하고 건너간 금당도에서 ‘금당팔경’의 네 번째 경치라는 ‘교암청풍’ 해안절벽 길을 만났다. 여기서 만난 압도적인 경관이 여정의 중심과 순서를 다 바꿔버렸다.
금당도는 기이한 바위로 이뤄졌다. 특히 북쪽 사면이 그렇다. 금당도 가는 배에서 보면 섬 하나가 통째로 바위산처럼 보인다. 거대한 주상절리와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섬은 곳곳에 비경을 감추고 있다. 그중에서 교암청풍 부근 해안 절벽은 거대한 습곡이 기이한 형상을 이루고 있다. 아슬아슬 직벽 해안을 따라 걸으면서 몇 번이나 ‘뭐 이런 곳이 다 있냐’는 말이 나왔다.
남도의 끝 고흥은 멀고, 거기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금당도는 더 멀다.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여행자가 금당도까지 가야 할 이유는 없다. 먼 거리와 소요되는 시간을 생각하면 ‘합당함’의 기준 허들도 높다. 그런데 교암청풍의 해안절벽은 합당함을 넘어 과분한 보상이다. 금당도에 가서 해안절벽 풍경을 보고만 오는 것으로 본전은 뽑는다. 기사를 읽고 금당도에 다녀왔다는 적잖은 지인들의 한결같은 얘기였다.
고흥에서는 ‘맛’을 빼놓을 수 없다. 금당도를 다녀왔을 무렵, 고흥에서는 황가오리와 갑오징어가 많이 잡혔다. 지금 고흥 나로도에서는 삼치와 함께 때아닌 병어가 한창이다. 여러 번의 고흥행으로 맛집 목록이 추려졌다. 죽시식당, 평화국밥, 동강갈비탕, 과역기사님식당…. 고흥의 ‘양대 빵집’도 있다. 도화면의 ‘하얀마을’과 과역면의 ‘르와르제과’다. 올해 새로 문을 연 동일면의 ‘유자제빵소’가 여기 가세했다.‘하얀마을’ 근처에 낡은 구옥을 카페로 꾸민 레트로풍 공간 ‘별다방’은 매번 빠뜨린 얘기다. 안채에 1990년대 소읍 풍경을 옮겨놓은, 세트장 같은 레트로 공간이 인상적이다. 광주 통기타그룹에서 활동했다는 가수 황락천이 고향에 공연을 겸하는 카페로 문을 열었는데, 주민의 소음 민원에 정작 라이브 공연을 못 하고 있다.
위 사진은 빈탄섬의 사진 명소 ‘텔라가 비루’. 푸른 호수란 뜻이다. 아래는 리조트 ‘인디고 빈탄 라고이 비치’의 해 질 무렵 풍경.
4. 잊혔던 여행지…‘인도네시아 빈탄’
20여 년 전만 해도 명실상부한 최고급 신혼여행지였던 빈탄은, 한국인 여행자 사이에서 한동안 잊힌 곳이었다. 여행 상품 목록에서 빈탄의 이름이 사라진 지 10년이 넘었다. 중년 이상에게 빈탄은 추억의 이름이고, 그 아래 세대들에게 빈탄은 참신하고 새로운 여행지다.
빈탄은 싱가포르 아래 떠 있는 물방울처럼 생긴 섬이다. ‘싱가포르 아래’라고 했지만, 섬은 싱가포르 땅의 2.5배 크기다. 제주도보다도 크다. 빈탄은 인도네시아 땅이지만 싱가포르와 훨씬 더 가깝다. 싱가포르에서 빈탄까지 거리는 바닷길로 45㎞. 배를 타면 1시간이 채 안 걸린다.
빈탄은 1991년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가 ‘아시아 최고의 리조트’를 짓기로 의기투합해서 조성한 섬이다. 땅이 없는 싱가포르, 자본이 없는 인도네시아가 손을 잡고 천혜의 자연을 가진 빈탄섬 리조트 개발을 시작했다. 빈탄리조트는 철저한 계획 아래 조성됐다. 여느 해변 휴양지처럼 기왕의 관광 명소를 비집고 들어가 지형 조건에 맞춰 리조트를 들여놓은 게 아니라, 세계적인 명성의 리조트 기업들이 빈 해변에서 훌륭한 자연과 가장 적절하게 어우러지는 자리를 딱 찍어 명소를 만들어냈다.
빈탄리조트에는 독립해변을 가진 21개의 리조트가 있고, 4개의 골프 코스가 있으며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 인공해변 수영장 등 다양한 레포츠 시설이 있다. 리조트 구역에는 반얀트리, 클럽메드, 인디고, 쉐라톤, 앙사나, 카시아 등 세계적인 명성의 리조트 브랜드가 줄줄이 들어서 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해변 샬레와 로맨틱한 빌라, 가족 친화적인 콘도미니엄도 있다. 빈탄리조트의 매력은 월등한 가격 대비 만족도다.
빈탄리조트 패키지 여행 상품은, 아직도 여행사의 상품리스트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과 리조트의 뛰어난 입지와 매력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런 과소평가가 역설적으로 빈탄이 아직도 조용하고 호사스러운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이유다. 빈탄에서 추천하는 리조트는 호텔 인디고 빈탄. 가족 단위라면 콘도미니엄 스타일의 카시아리조트가 적격이다. 럭셔리 리조트로는 반얀트리와 더 산차야가 양대 리조트다.
좌도에서 만난 매화. 늦은 개화 탓에 만개한 건 이 한 송이가 전부였다. 반쯤 핀 꽃 하나를 더해 이틀 동안 1.5송이의 매화를 봤다.
5. 외딴섬서 만난 봄꽃…‘경남 통영 좌도’
여행자에게 가장 반가운 계절은 봄이다. 봄은 꽃과 함께 온다. 해마다 이른 봄에 꽃소식을 전하는 이유다. 봄꽃 취재는 개화기가 짧아서 어렵다. 꽃 다 진 뒤에 봄꽃의 감격을 얘기할 수 없으니, 매번 서두르게 된다. 기사가 나가고 독자가 그 기사를 보고 거길 가는 시간까지 감안해야 하는 까닭이다. 봄꽃이 이미 만개했을 때 가면 늦는다. 더 난감할 때가 꽃 보러 갔는데, 아직 꽃이 안 피었을 때다. 지난봄이 그랬다. 경남 통영의 작은 섬 좌도에 갔을 때의 얘기다. 좌도는 한산도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작은 섬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봄이면 이 작고 호젓한 섬에는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다.
좌도의 매화는 꽃구경하자고 심은 건 아니다. 고기잡이도 잘 안되고 농토도 없는 작은 섬에서 ‘돈 되는 일’을 찾던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수산업자가 심고 간 매실나무에서 힌트를 얻었다. 해마다 매실이 제법 달리는 걸 본 주민들이 마을의 빈터와 산자락에 매실나무를 심었다. 매실 소비가 좋았던 시절에는 수입이 짭짤했지만, 지금은 별 재미가 없다. 매실은 시세가 좋지 않지만, 이른 봄 남녘 섬의 매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
좌도에 간 때는 너무 일렀다. 섬 전체를 통틀어 매화 1.5송이를 봤다. 0.5송이는 반쯤 핀 꽃이다. 꽃은 안 피었지만 섬마을 이곳저곳에서 매화가 만개했을 때의 풍경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좌도가 각별했던 건 고즈넉해서다. 웬만한 봄꽃 명소는 봄이면 북새통을 이루지만, 좌도는 마을 뒤 언덕은 물론이고 집 마당에도 매화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곳인데도 찾아오는 이는커녕 아는 이들도 별로 없다. 돗자리 하나 들고 가서 내키는 대로 꽃구경하다가 꽃향기에 취해서 돌아올 수 있는 곳. 좌도는 그런 곳이다.
좌도는 통영에서 뱃길로 11㎞ 남짓 떨어진, 그리 멀지 않은 섬이다. 좌도로 가는 배편은 하루 두 번. 한산농협의 카페리호가 오전 7시에 출항해 용초-호두-죽도-진두-동좌-서좌-비산-화도를 들러서 간다. 여객선은 한산도를 중심에 두고 반시계방향으로 돌며 인근의 섬이란 섬은 다 들른다. 그야말로 ‘완행 중의 완행’이다. 봄날에 작은 섬으로 꽃 보러 가는 나른한 여행에 맞춤하다.
■ 6번째 여행지는 단연 ‘3월 제주’
마지막까지 여행 5선(選)의 후보로 저울질하다가 내려놓은 곳이 제주도다. 제주 여행은 가성비 최고의 여행법을 다뤘다.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 첫 주 김포∼제주행 2박 3일 왕복 항공권이 3만6000원. 렌터카는 하루 3만 원 이하였다. 숙박요금도 연중 최저가다. 여기다가 제주의 3월에는 그윽한 향기의 ‘백서향(白瑞香)’이 있다. 올해도 사정은 비슷할 테니 3월 첫 주를 노려보시라.
박경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