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온라인 의약품 구매가 점점 대중화되면서 소비자들의 후기와 평가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약국은 다양한 고객층으로부터 꾸준한 호평을 받아온 신뢰도 높은 플랫폼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본 기사에서는 하나약국의 이용자들이 실제 후기를 통해 언급한 10가지 핵심 장점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약국 - 비아그라 구매 사이트
2. 합리적인 가격 정책
하나약국의 또 다른 큰 장점은 바로 ‘합리적인 가격 정책’입니다. 온라인 약국을 이용하는 소비자들은 편리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격 대비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약국은 타 약국들과 비교해도 가격 경쟁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동일한 정품 의약품임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약국보다 저렴한 가격에 제공되며, 이는 소비자들로 하여금 반복 구매로 이어지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후기를 살펴보면 “오프라인 약국보다 20~30% 저렴해서 좋았다”, “품질은 그대로인데 가격은 훨씬 합리적이라 만족한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또한 하나약국은 고객의 구매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할인 혜택과 프로모션도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일정 금액 이상 구매 시 무료 배송 혜택까지 제공해 추가 비용 걱정도 덜 수 있습니다.
특히 성기능 개선제나 다소 가격이 높은 전문의약품을 정기적으로 구매해야 하는 고객에게는 하나약국의 가격 정책이 큰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단순히 저렴함을 넘어서, 품질과 가격이 균형을 이루는 ‘가성비’ 측면에서 하나약국은 매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많은 이용자들이 하나약국을 “가격 때문에 시작했지만, 만족 때문에 계속 이용하게 되는 곳”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합리적인 가격은 고객의 신뢰를 형성하고 재방문을 유도하는 핵심 요소이며, 하나약국은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에 옮기는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1. 정품 보장에 대한 높은 신뢰도
하나약국을 이용한 고객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정품 보장에 대한 확실한 신뢰’입니다. 온라인에서 의약품을 구매할 때 소비자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제품이 진짜인지, 안전한 유통 경로를 거쳤는지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그러나 하나약국은 정식 제약사 또는 공식 수입사를 통해 공급받은 제품만을 판매하며, 이를 후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소비자들이 “정품이라는 확신이 들어 안심된다”, “위조 의약품 걱정 없이 구매할 수 있어 좋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이는 하나약국의 신뢰도를 더욱 높여주는 요인이 됩니다.
또한, 제품마다 유통기한과 제조 정보가 명확히 기재되어 있으며, 포장 상태 역시 매우 꼼꼼하여 정품 여부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요소가 많습니다. 일부 사용자는 병원에서 처방받은 동일한 제품과 비교했을 때 품질 차이가 없었다는 경험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후기들은 처음 이용하는 고객들에게 큰 신뢰를 주며, 하나약국의 정품 보장 정책이 단순한 광고 문구가 아닌 실제 운영 원칙이라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결과적으로, 정품 보장에 대한 확신은 단순히 제품의 품질 문제를 넘어 고객의 건강과 직결된 중요한 가치로 작용합니다. 하나약국은 이와 같은 고객의 신뢰를 바탕으로 장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정직하고 투명한 운영으로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하나약국 - 비아그라 구매 사이트
3. 빠른 배송 서비스
하나약국의 ‘빠른 배송’은 후기에서 특히 자주 언급되는 장점 중 하나입니다. 온라인에서 의약품을 구매할 때, 많은 소비자들은 “언제 도착할까”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약국은 대부분의 주문을 당일 발송하며, 수도권 및 주요 지역에서는 익일 또는 1~2일 내에 수령이 가능합니다. 실제 후기에는 “하루 만에 약을 받았다”, “생각보다 너무 빨라서 놀랐다”는 만족의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또한 배송 상태도 매우 깔끔하고 포장이 훼손되지 않도록 꼼꼼하게 처리되어 있어, 제품이 안전하게 도착하는 점 역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빠르고 안정적인 배송 시스템은 특히 급하게 약이 필요한 상황에서 고객들에게 큰 신뢰를 주며, 재구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하나약국 - 비아그라 구매 사이트
4. 친절하고 전문적인 상담 서비스
하나약국이 소비자들에게 높은 만족도를 주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전문 상담 서비스’입니다. 후기를 보면 많은 고객들이 약사 또는 전문 상담원과의 상담을 통해 자신에게 적절한 제품을 추천받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약에 대해 잘 몰랐는데 친절하게 설명해줘서 좋았다”, “상담을 받고 나니 더 믿음이 갔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또한 상담은 단순한 제품 추천을 넘어, 복용 시간, 복용 주기, 부작용 가능성 등 구체적인 의약 지식을 포함하고 있어 비대면 환경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약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문성은 오프라인 약국 못지않은 정보 전달력을 갖추고 있으며, 특히 초보 구매자나 민감한 의약품을 처음 접하는 소비자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5. 익명성 보장
의약품, 특히 성기능 개선제나 심리적인 문제와 관련된 약품의 경우 구매자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개인정보 노출’입니다. 하나약국은 이러한 소비자의 심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완벽에 가까운 익명성을 보장합니다. 실제 후기에서는 “포장이 중립이라 내용물 노출 걱정이 없었다”, “받아보니 겉으로는 어떤 제품인지 전혀 알 수 없어 안심됐다”고 언급됩니다. 제품은 일반 택배 상자나 완충 포장으로 배송되며, 송장에도 상품명이 표기되지 않아 가족이나 타인과 함께 거주하는 소비자들도 부담 없이 제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정보 보호 정책도 철저하여 고객 데이터가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익명성 보장은 하나약국을 믿고 반복 이용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6. 모바일 최적화된 웹사이트
하나약국은 사용자 편의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웹사이트를 설계했으며, 특히 모바일 환경에서도 매우 최적화되어 있다는 점이 큰 장점입니다. 후기에서는 “핸드폰으로도 제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모바일 결제도 간편해서 좋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직관적인 메뉴 구성과 빠른 검색 기능은 연령이나 디지털 경험에 상관없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또한 제품 상세페이지에는 주요 성분, 효과, 사용법, 주의사항 등이 꼼꼼히 정리되어 있어 앱이나 별도의 상담 없이도 구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고객 중심의 디자인과 UX는 사용자의 편리함을 극대화하며, 특히 바쁜 일상 속에서도 스마트폰 하나로 빠르고 간단하게 약을 주문할 수 있는 점은 많은 고객의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7. 다양한 제품군 보유
하나약국은 단순히 성기능 개선제만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건강 관련 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 일반의약품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후기를 보면 “비아그라 구매하러 들어왔다가 소화제도 같이 샀다”, “필요한 약이 다 있어서 편리하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비아그라, 시알리스, 프릴리지 등 남성 기능 개선제 외에도 피로 회복제, 피부 트러블 개선제, 다이어트 보조제, 간 건강 보조제 등 다양한 제품이 있으며, 이들 역시 정품 인증을 받은 신뢰할 수 있는 제품입니다. 한 곳에서 다양한 약을 한 번에 구매할 수 있다는 편리함은 소비자에게 큰 만족을 주며, 여러 사이트를 번거롭게 비교하거나 쇼핑할 필요가 없어 효율적입니다.
하나약국 - 비아그라 구매 사이트, 레비트라 구매
8. 처방전 없이도 구매 가능
하나약국이 소비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는 일부 약품을 ‘처방전 없이’ 간편하게 구매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병원 방문이 번거롭거나 시간적 여유가 없는 직장인, 학생, 고령자 등에게 큰 편의를 제공합니다. 후기를 보면 “병원 안 가고도 구매할 수 있어 시간 절약이 된다”, “민감한 질환이라 병원 가기 꺼려졌는데 하나약국 덕분에 쉽게 해결됐다”는 평가가 눈에 띕니다. 이는 온라인 약국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하나약국은 법적 허용 범위 내에서 고객이 가장 편리하게 약을 구매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병원 방문을 줄이고, 접근성을 높인 서비스는 특히 비대면 시대에 더 많은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약국 - 비아그라 구매 사이트
9. 철저한 품질 관리 시스템
하나약국은 제품의 ‘품질 관리’에도 매우 철저한 기준을 적용합니다. 후기에서는 “제품이 항상 깨끗하게 잘 포장되어 온다”, “유통기한이 넉넉해서 신뢰가 간다”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는 단순한 배송 품질을 넘어서, 고객에게 전달되는 모든 의약품의 상태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려는 내부 관리 시스템의 결과입니다. 보관 온도, 습도, 유통 이력 등 다양한 요소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은 사전에 공지하거나 철저히 제외하여 판매합니다. 이러한 품질 보증 체계는 하나약국이 단지 제품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소비자의 건강을 보호하는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신뢰를 심어줍니다.
10. 재구매율이 높은 만족도
하나약국의 후기를 종합적으로 보면, 첫 구매 후 ‘재구매’로 이어지는 비율이 매우 높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이는 단순히 한두 가지 서비스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가격, 품질, 상담, 배송 등 전반적인 서비스 품질이 고르게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기에서는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이제는 계속 여기만 이용한다”, “여러 약국 써봤지만 결국은 하나약국이 제일 믿을 만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렇게 높은 재방문율과 고객 충성도는 하나약국이 고객 중심의 철학을 지속적으로 실현해 왔다는 증거이며, 앞으로도 소비자들의 신뢰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11. 비아그라 정품 구매의 안정성
하나약국은 오리지널 비아그라 제품만을 취급하며, 이에 대한 후기에서도 많은 소비자들이 강한 신뢰를 표하고 있습니다. 특히 비아그라처럼 위조약 유통이 많은 의약품의 경우, 정품 여부는 고객의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하나약국을 이용한 많은 사용자들이 “병원에서 처방받은 것과 동일한 정품이었다”, “정품이라는 확신이 들어 마음 놓고 복용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이는 하나약국이 공식 유통 경로를 통해 정품만을 공급하고 있음을 방증합니다. 제품 포장, 제조일자, 유통기한 등이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어 소비자가 직접 정품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구조 또한 장점입니다. 신체에 직접 작용하는 약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정품 구매처라는 점은 하나약국을 선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12. 시알리스 구매의 용이성과 만족도
시알리스는 작용 시간이 길고 부작용이 적다는 점에서 비아그라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제품 중 하나입니다. 하나약국에서는 시알리스 정품을 다양한 용량과 포장 단위로 판매하고 있으며, 실제 구매 후기에서는 “병원 가는 번거로움 없이 쉽게 구입했다”, “정품이 맞고 효과도 확실했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특히 시알리스는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사용자들이 많기 때문에, 간편하고 반복적인 주문 시스템은 높은 재구매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시알리스 구매 시 함께 제공되는 복용 방법 안내 및 주의사항 자료 역시 고객의 복용 경험을 향상시키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하나약국의 편리한 주문과 빠른 배송, 철저한 익명 포장까지 더해지면서, 시알리스 구매의 만족도는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나약국 - 비아그라 구매 사이트
하나약국 - 비아그라 구매 사이트
13. 처방전 없이 비아그라·시알리스 구매 가능
많은 소비자들이 비아그라나 시알리스 구매 시 가장 큰 부담으로 느끼는 것은 병원 방문과 처방전 요구입니다. 하나약국은 해당 제품들을 처방전 없이도 간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어, 이러한 부담을 크게 줄여줍니다. 후기에서는 “병원 가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온라인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른 곳은 처방전 없이는 구매가 안 됐는데 여기는 편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물론 판매는 합법적인 유통 기준 내에서 운영되며, 제품에 대한 복용 설명과 주의사항은 충분히 제공되기 때문에 안전성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특히 민감한 문제로 병원을 찾기 어려운 고객들에게는 큰 혜택으로 작용하며, 이러한 접근성은 하나약국의 강력한 경쟁력이 되고 있습니다.
14. 정기 구매자에게 제공되는 할인 혜택
하나약국은 비아그라, 시알리스 등 자주 구매하는 의약품에 대해 정기 고객을 위한 다양한 할인 혜택을 제공합니다. 후기에서는 “여러 번 구매하니까 할인 쿠폰도 받고 배송비도 절약됐다”, “정기구매로 가격 부담이 확 줄었다”는 만족스러운 반응이 많습니다. 특히 일정 수량 이상 구매 시 자동으로 적용되는 할인, 신규 고객 및 재구매 고객 전용 프로모션 등이 존재하며, 이벤트 기간에는 더 큰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가격 경쟁력은 정품이라는 기본 신뢰 위에 더해지는 큰 장점으로, 소비자들은 품질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는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하나약국은 고객에게 신뢰뿐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까지 제공하는 온라인 약국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15. 민감한 제품 배송의 철저한 익명 보장
비아그라나 시알리스 같은 제품을 구매할 때 소비자들이 가장 예민하게 생각하는 부분 중 하나는 배송 과정에서의 익명성 보장입니다. 하나약국은 이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제품 포장은 중립적인 택배 박스를 사용하고, 송장에도 제품명이 전혀 기재되지 않습니다. 실제 후기에서 “외관으로 절대 의약품이라고 알 수 없었다”, “가족이나 동거인 몰래 받아도 전혀 문제없었다”는 피드백이 많습니다. 또한 수령자 이름, 연락처, 주소 등 개인정보는 엄격한 보안 시스템 하에서 관리되며, 절대로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처리됩니다. 이런 철저한 프라이버시 보호 시스템 덕분에 하나약국은 민감한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에게 심리적 안심을 제공하며, 이는 다른 온라인 약국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강점입니다.
하나약국 - 비아그라 구매 사이트;하나약국 후기
16. 다양한 비아그라·시알리스 제네릭 제품 선택 가능
하나약국은 정품 비아그라와 시알리스뿐만 아니라, 공식 허가된 제네릭(복제약) 제품들도 폭넓게 취급하고 있어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혀주고 있습니다. 후기에서는 “비아그라는 비싸서 부담됐는데 제네릭 덕분에 저렴하게 해결했다”, “효과는 똑같은데 가격은 절반 수준이라 가성비가 좋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습니다. 제네릭 제품은 오리지널과 동일한 주성분을 사용하며, 복용 효과는 거의 차이가 없으면서도 가격이 훨씬 합리적입니다. 하나약국은 이들 제품도 정식 유통을 통해 확보하고 있어, 품질이나 안정성에 대한 걱정 없이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제품군을 갖추고 있다는 점은 약을 처음 복용하는 사용자뿐 아니라, 본인에게 가장 적합한 제품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큰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기자
[email protected]편집자주
6·25 전쟁 75주년 기획 ‘명장’은 대한민국을 구한 장군들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조명합니다.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 전황을 뒤집은 리더십의 성공 비결을 알아봅니다.
부산역전 대화재 직후인 1953년 겨울 부산 중구 40계단 주변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스(한국저작권위원회)
1953년 11월 27일. 아침부터 부산 날씨는 평소와 달랐다. 최저 기온(복병산 관측소 기준)이
바다이야기예시 영상 3도이고 낮 최고 6도에 머무르더니, 일몰 직후 다시 3도로 내려갔다. 부산의 11월 말 평년 낮 기온이 13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확실히 추운 날이었다. 바람도 세찼다. 초속 10m 내외 강풍이 북쪽에서 계속 불어왔다. 습도는 21%로 매우 건조했다. 추위, 바람, 마른 공기. 이 세 가지 기상 요소는 부산 시내에 곧 닥쳐올 대재앙의 주요 원인으로
바다이야기무료머니 작용하게 된다.
“아세아에서 가장 격렬한 공산주의 적수인 이승만과 장개석은 공동의 적에 대한 동맹관계를 강화할 목적으로 회담에 착수하였다.”
(조선일보 1953년 11월 29일 자 머리기사)
릴게임몰 1953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이 장제스 대만 총통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왼쪽 첫 번째 인물은 변영태 외무부 장관. 대통령 기록관
이날은 서울도 아침 기온이 영하 3도까지 떨어지며 추웠다. 대통령 이승만은 중화민국(대만) 총통 장제스(장개석)를 만나기 위해 오전 8시 3
모바일릴게임 0분 여의도 비행장을 출발했다. 한국 정부는 타이베이 송산비행장(지금의 쑹산국제공항)까지 6시간 비행할 수 있는 여객기를 구할 수 없어, 유엔군사령부에서 존 헐 사령관 전용기(록히드 컨스텔레이션)를 빌려야 했다.
6·25전쟁은 4개월 전 휴전협정으로 중단된 상태였다. 대규모 교전이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불안한 정세에서, 당시 한국의 대(對
메이저릴게임사이트 )대만 외교는 대미 외교 다음으로 중요한 안보 과제였다. 중화민국(국민당)은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패해 대만섬까지 밀려난 처지였지만, 여전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승계)으로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승만과 장제스는 공산당을 상대로 치열한 전쟁(국공내전·한국전쟁)을 치른 ‘반공 지도자’란 점에서 강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총 세 차례 있었던 이승만-장제스 만남 중 이때가 유일한 ‘정상회담’이다. 1차 회담은 1947년 4월 난징에서 있었는데, 당시 장제스는 국민정부 주석이었지만 한국은 미군정 기간이어서 이승만은 정객에 불과했다. 2차 회담은 1949년 8월 한국 진해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이승만이 대통령이었으나 장제스가 국공내전 전황 악화로 총통 자리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다. 마지막 회담이 바로 1953년 11월. 이승만은 재선 대통령이었고, 본거지를 대만으로 옮긴 장제스는 다시 총통으로 복귀한 뒤였다.)
두 정상은 공동의 적 공산주의 국가들을 견제할 ‘반공동맹’ 결성을 위해 만났다. 한중일 3국(당시는 ‘중’이라고 하면 대만을 의미했다)이 참여하는 반공 삼각동맹을 결성하려 했던 장제스는 먼저 한국에 손을 내밀었다. 이승만은 대만과 동맹을 체결하면 미군이 철수할 수 있다고 걱정해 이 제안을 꺼렸지만, 11월 중순 방한한 리처드 닉슨 미국 부통령으로부터 대만 방문을 권유받은 뒤 타이베이행 비행기에 오를 결심을 했다. 국민당 정부와 반공통일전선을 결성한 뒤, 미국·필리핀 등 다른 국가들을 끌어들여 태평양 동맹으로 격상시키자는 게 이승만의 복안이었다. 이승만은 이번 대만 방문에서 장제스에게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는데, 그때까지 수훈자는 이승만 본인 및 초대 부통령 이시영을 빼면 제임스 밴플리트 미 육군 대장(8군사령관)이 유일했다.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 직후 화재 군인들이 감식을 위해 화재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부경근대사료연구소)
“국제시장 대화재 기억도 가시지 않은 이때, 또다시 참화를 입은 시민들은 칠흑 같은 캄캄한 거리에서 하늘에 닿을 듯한 불길만 쳐다보며 땅을 치고 울고 있다.”
(부산역전 대화재 당시 경향신문 기사)
부산역전 대화재의 전말
그렇게 장제스가 이승만을 위해 만찬을 열고, 한국-대만 밀월이 무르익고 있던 11월 27일 밤. 부산에선 정부 수립 후 최대 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오후 8시쯤 중구 영주동 뒷산 판자촌에서 최초 발화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어느 민가 다다미방에 설치된 난로(어떤 보도에선 조리용 풍로)에서 불씨가 번지기 시작했다. 피란민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도시 부산은 동네마다 판잣집이 즐비(3만5,000채 추정)했고, 겨울이면 판자촌 난방·조리기구에서 시작된 크고 작은 화재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 도시 적정 수용인원(30만 명)의 세 배에 달하는 인구(1953년 82만 명)로 인해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렸다.
그날은 특히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구봉산을 넘어온 북풍은 초속 10m 이상 빠른 속도로 도심을 향해 남하했고, 불씨는 메마른 바람을 타고 항구 쪽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영주동(메리놀병원 인근)에서 시작된 불은 동광동(40계단), 중앙동(현재 중앙역)을 거쳐 구 부산역(현재 중앙동 무역회관 인근)을 집어삼킬 정도로 커졌다. 판잣집 주인들은 비바람을 막기 위해 미군부대에서 나온 기름종이를 가져다 썼는데, 이 종이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6·25 전후 부산에서 발생한 주요 화재. 강준구 기자
조선일보는 화재 발생 다섯 시간 후인 28일 오전 1시 중앙동 일대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화염이 50척(약 15m) 높이로 하늘을 찌르고 300척(90m) 넓이의 엄청난 불바다를 이루어 부산역 앞 넓은 길을 뛰어넘고 있다.” 부산일보 현장 기자는 ‘불바다를 가다’라는 제목의 르포기사에서 “판잣집이 송두리째 바람에 날려 이곳저곳에 떨어지며 새로운 불씨를 뿌리자, 마치 기관차가 달리는 듯한 폭음과 울부짖는 아우성 소리가 났다”고 적었다. 주민들이 급히 수레에 싣던 이삿짐이 운반도 하기 전 다 타버릴 정도로 불 번지는 속도가 빨랐다.
대화재는 28일 오전 10시까지 14시간 동안 부산역전 일대를 다 태웠고, 이 불로 주택 3,132채가 전소됐다. 부산일보, 부산방송국(KBS총국), 부산우편국, 철도국, 부산역, 주한미기지사령부, 합동통신, 부산세관 등 이 일대 중요 건물이 모두 불에 탔다. 사상자가 29명, 이재민은 6,000여 세대 3만 명에 이르렀다. 재산 피해액은 총 177억 환으로 추산됐는데, 1953년 전체 정부 예산이 284억 환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부산역전 대화재가 얼마나 큰 재난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화재 피해에 정부로서 미안하기 짝이 없다. 대통령 각하께서 부재중이나 우리(국무위원)가 모여 우선 긴급대책을 몇 가지 정하였다. (중략) 특히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미8군 후방사령관이 이른 아침에 부산에 가서 구호대책 등에 적극 협력해 준 점이다.”
(1953년 11월 28일 백두진 국무총리 긴급 담화)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 현장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존 헐 유엔 군사령관. 대통령기록관
'부산의 구세주’ 위트컴 등장
이재민 3만 명. 당시 부산 인구(84만 명)의 3.7%가 하루아침에 집도 없이 추운 길바닥에 나앉았다. 하필 대통령 해외 방문 중 대형 참사가 벌어지자 백두진 국무총리가 재난 사령탑을 맡았고, 내무부 사회부(복지부) 국방부 등 관계 장관들이 부산으로 급파돼 현장 수습을 담당했다. 경남도와 부산시도 구호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며 이재민에 대한 의식주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는 이 재난을 스스로 수습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구호물자와 재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미 전쟁으로 산업시설이 다 파괴돼 국가가 세금을 거둘 곳이 없었고 그나마 모인 나랏돈마저 전쟁에 다 써버린 터라, 정부 곳간에 돈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의복과 식량은 어찌어찌 준비한다 해도, 거처가 가장 문제였다. 11월 29일 정오 기준으로 부산구호본부가 부두수용소, 남도극장, 영선국민학교 등에 수용하고 있다고 밝힌 이재민은 470세대, 2,800여 명이었다. 전체 이재민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금자리를 잃고 길거리를 떠도는 주민이 많았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거리에서 방황하는 이재민을 위해, 당국에서는 화재를 면한 주민들로 하여금 주먹밥을 갹출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정부가 일반 시민들에게 이재민 끼니를 반강제로 떠넘겨야 했을 정도로 당시 상황은 열악했다.
한국전쟁 후반기 미 제2군수사령관으로 재직한 리처드 위트컴 준장.
이때 결정적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리처드 위트컴 미 육군 제2군수사령관(준장)이다. 제2군수사령부(옛 부산군수사령부)는 미8군 예하 부대 및 국군 부대에 대한 군수지원, 보급, 수송 등을 맡은 부대였다. 위트컴은 2차대전 유럽 전선에서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고 불린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군수부대장을 역임했고, 1945년 필리핀 마닐라 항만 지휘관을 지낸 병참 분야 최고 전문 장교였다. 캐나다 뉴펀들랜드 주둔 부대 사령관이던 그는 한국전쟁 끝 무렵인 1953년 7월 23일부터 부산 주둔 제2군수사령부를 맡았다.
부임 4개월 만에 대재앙을 접한 위트컴은 길바닥에서 배를 곯고 있는 부산 시민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미군 창고를 열었다. 미 국방부가 발행하는 일간신문 성조지(The Stars and Stripes)의 당시 기사를 보면, 위트컴은 매일 2만3,100명분의 식량(ration)을 풀었다. 여기에 더해 미군은 담요, 난방기구, 텐트 등 구호품을 제공했다. 위트컴은 화재 이튿날부터 공병부대를 투입해 피해 지역 정리 작업에 나섰고, 미군 부대에 이재민 등 4만 명이 기거할 수 있는 임시 천막촌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안성기·박중훈 주연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촬영 장소이기도 한 동광동 40계단(대화재로 위치 변경) 근처엔 당시 미군이 설치한 이재민 텐트촌이 들어섰다.
리처드 위트컴 이력. 송정근 기자
“단 한 사람의 화재 피해자라도 식량, 주거지, 의료 지원을 못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위트컴 장군의 성조지 인터뷰)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을 사실상 대신한 위트컴의 활약은 펜타곤 수뇌부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화재 직후 부산을 방문한 찰스 토머스(나중에 해군장관) 미 국방부 군수차관보는 귀국 후 위트컴에게 서신을 보내 “장군의 지휘하에 있는 장병들의 사기와 그들의 헌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장군의 부대원들이 어떻게 나라를 위해 일하는지 직접 지켜본 나는 미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위트컴의 역할은 긴급 구제와 임시 텐트촌 부설에 그치지 않고, 항구적인 도시 재건 사업으로 이어졌다. 1953년 12월 19일 경남도와 부산시는 “미군과 함께 화재 피해 지역을 현대적인 상업·주거지역으로 다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는데, 이 계획의 미국 측 책임자가 바로 위트컴이었다. 성조지가 부산역전 대화재 1주년을 맞아 1954년 12월 게재한 기획기사를 보면, 당시 미 육군은 부산 도심 재건을 “역사상 (미군이 수행한) 가장 거대한 민간 원조 계획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전투부대가 없는 후방 도시에서 상시 근무하는 유일한 미군 장성이었던 위트컴은 부산에서 ‘미국의 얼굴’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미군이 남긴 행사 관련 기록을 보면, 위트컴이 각종 민군 행사에서 미국 측 대표로 등장하는 모습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위트컴은 1954년 9월 부산 재건을 위한 모금운동 행사에서 갓을 쓰고 도포를 걸친 채 부산 시내를 행진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전속부관 마사 보일스 대위도 얹은머리를 한 채로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동반했다.
리처드 위트컴 장군과 그의 전속부관 마사 보일스 대위가 1954년 9월 부산 시내에서 열린 모금행사에 한복을 입고 참여했다. 미 성조지
“산모 중 한 명은 일곱 번째 아이를 임신했는데, 우리 병원에 오기 전까지 여섯 명 아이가 연달아 죽었다. 모유가 부족했지만 우유 배급 덕분에 작은 여야는 잘 자랐고, 현재 걷고 있다.”
1954년 부산 일신부인병원 연간보고서
부산 교육과 의료에도 헌신
위트컴의 국내 행적을 오랫동안 취재했던 오상준 국제신문 기자에 따르면, 위트컴은 의식주 이외에 부산 지역 교육·의료 분야에도 큰 기여를 아끼지 않았다. 대표적 업적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경남지사를 설득해 부산대 장전캠퍼스(메인 캠퍼스) 부지 165만㎡(약 50만 평) 마련에 기여한 것이다. 위트컴은 부산대의 협조 요청을 받고 캠퍼스 건설에 25만 달러어치의 자재 제공을 약속했으며, 나중에 학생들이 통학에 불편을 겪자 미군 공병부대를 동원해 버스 종점인 온천장(온천동)에서부터 부산대 무지개문(장전동)까지 1.6㎞ 구간 도로를 닦아줬다.
미국 메리놀(Maryknoll) 수녀회의 의료봉사 거점이던 메리놀수녀의원(진료소)을 ‘메리놀병원’으로 키운 공로자도 위트컴이다. 그는 미군의 대한원조프로그램(AFAK)을 통해 병원 건물 신축을 지원했고, 공식 지원 외에 미군 장병들이 월급 1%를 병원 공사비로 기부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 덕분에 메리놀병원은 지상 3층, 16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으로 거듭났다. 성분도병원, 독일적십자병원 등 다른 의료기관 건립에도 위트컴의 도움이 있었다.
위트컴이 조산소를 설치했던 일화도 인상적이다. 1954년 5월 영도 피란민촌을 순시하던 위트컴은 만삭 임산부가 보리밭에 몸을 숨기고 아이를 낳는 비참한 장면을 목격했다. 부산 최초 산부인과 일신부인병원을 열었던 매켄지 자매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출산의 80% 이상이 집에서 이뤄진 가정분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피란촌 천막 하나에는 일고여덟 세대 40여 명이 한꺼번에 거주했기 때문에 사적 공간이 존재할 수 없었다. 결국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외부 공간(보리밭)에서 분만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를 본 위트컴은 조산원을 세웠다. 일신부인병원이 1955년 새 건물로 옮겨갈 수 있었던 것도 위트컴이 관여한 AFAK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리처드 위트컴이 부산에 남긴 업적. 강준구 기자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위트컴 장군.”
(부산 평화공원 위트컴 조형물에 새겨진 글귀)
한국에 바친 인생 후반전
1954년 12월 연령 정년(60세)을 맞아 군복을 벗은 위트컴은 잠시 미국으로 갔다가 이내 ‘제2의 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승만의 정치고문 역할을 하며 한미 정부 가교 역할을 자임하는 한편, 제임스 벤플리트 전 미8군사령관과 함께 전후 구호사업 단체 한미재단(American Korean Foundation)의 활동을 주도하며 재단 이사직을 수행했다. 미국 내 친한파 인사들로 구성된 한미재단은 군사·경제 원조가 절실히 필요했던 한국의 사정을 미 정부에 충실히 전달하는 창구였다. 1952~1976년 한미재단을 통해 약 5,000만 달러의 원조(현금+기타 지원)가 이뤄졌는데, 이승만·박정희 등 1950·60년대 한국 대통령들이 미국을 방문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일정이 바로 한미재단에서의 연설이었다.
6·25 전후 전국 육아시설 수용 인원. 강준구 기자
인생 후반전을 한국에서 보내기로 한 위트컴이 직시한 것은 전재고아(戰災孤兒) 문제였다. 당시로서 고아 문제는 전쟁을 끝낸 이 나라가 풀어야 할 가장 심각한 난제 중 하나였다. 전쟁으로 부모가 사망하거나(고아), 보호자에게 버림받거나(기아), 부모를 잃고 길에서 헤매는(미아) 아이들이 대략 10만 명에 달했다. 전쟁 직전인 1953년 4월 내무부 치안국(경찰)이 추산한 수치는 17만 명에 이르렀다. 1953년 기준 전국 보육시설 440곳에 수용된 아이들이 약 5만4,000명이었으니, 상당수 나머지 고아들은 ‘부랑아’ 취급을 받으며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심부름과 간단한 통역 업무 수행)를 했다면 매우 잘 풀린 경우이고, 대부분은 구두닦이(슈샤인보이) 신문팔이(뉴스보이) 넝마주이(시라이) 껌팔이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조직에 속해 ‘왕초’의 통제를 받으며 거리로 구걸을 나선 아이들도 많았다.
위트컴은 전역 후 이런 전쟁고아들을 돕기 위한 활동에 주력했는데, 그가 직접 지원한 고아원만 53개에 달했다. 위트컴은 전쟁고아들을 돕는 과정에서 천안 익선원(아동복지시설)을 운영했던 사회사업가 한묘숙(1927~2017)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기도 했다.
“미국이 유해 송환을 위해 접촉하는 45개국 전부가 이 문제를 인도주의적 노력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유일한 예외가 북한이다. 슬프게도, 북한은 미국에 양보를 얻는 도구로써 이를 계속 이용하고 있다.”
(켈리 맥케이그 미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 국장)
지난해 11월 11일 제19회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기념식이 열린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서 6·25전쟁 유엔군 참전용사가 전우들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나를 한국에 묻어 주시오”
1982년 위트컴은 “북한에 남은 미군 장병의 유해를 고국 땅으로 보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했다. 그는 생전부터 북한 땅에 묻힌 미군 유해를 되찾아오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장진호 전투(1950년 11~12월)에서 사망한 미 육군과 해병대원의 유해 반환을 위해 노력했다. 전투부대 지휘관이 아니었던 그가 유해 발굴에 각별히 힘을 쏟았던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신문 기사에 위트컴이 판문점에서 이뤄진 유엔군-공산군 간 유해 교환에 관여하거나, 돌아온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행사에 참여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해 송환 업무를 수행하며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 유언은 아직 결실을 맺지 못했다.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에 따르면, 6·25전쟁 중 발생한 미군 실종자는 8,157명인데 이 중 7,386명이 아직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북한에 묻혀 있는 유해는 약 5,300구로 추정된다. 북한은 휴전 이듬해인 1954년 유엔군 유해 4,000여 구를 반환(글로리 작전)했지만, 이후로는 1990년 미군 유해 208상자, 2018년 55상자만 돌려보내는 등 유해 발굴과 송환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의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로는 유해 송환 문제에 전혀 진전이 없다.
위트컴의 다른 유언은 “나를 부산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미 대륙 정중앙 캔자스에서 태어나 38년 군 생활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녔던 그는 마지막 임지이자 제2의 고향 부산에서 영면 중이다.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2,336명의 유엔군 참전용사 중 유일한 장성급 장교(장군)가 바로 위트컴이다.
6·25 전엔 한국과 아무런 인연을 맺지도 않았고, 심지어 한국이란 나라 자체를 몰랐던 유엔군 참전용사 중엔 수십 년 후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며 실제 한국에서 영면한 사례가 적지 않다. ‘부산의 성자’ 위트컴은 그가 사랑했던 도시에 묻혔고, 캐나다 참전용사 아치볼드 허시는 “한국에서 함께 싸우다 전사한 형(조셉)과 함께 잠들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며 2012년 유엔기념공원 조셉의 무덤에 합장됐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전우들을 평생 그리워하던 네덜란드 용사 니콜라스 프란스 웨셀도 63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2016년 유엔기념공원에서 영면했다.
죽음이 곧 닥쳐올 것을 감지하면, 인간은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긴 곳을 영면의 장소로 떠올린다. 보통은 고향이나 부모·형제·배우자가 잠든 곳을 생각하겠지만, 참전용사들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을 자극하는 장소는 가장 꽃다웠던 청춘을 바친 전장인 경우가 많다. 전선의 공포, 날씨와의 사투, 승리의 희열, 민간인 피해자를 향한 연민, 전우의 죽음 뒤 찾아오는 상실감 등.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고 원초적인 희로애락이 바로 전쟁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을 ‘또 다른 고향’이나 ‘제2의 고향’으로 일컫는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말은 그래서 결코 거짓이나 과장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2023년 7월 27일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서 프랑스 참전용사가 전우의 묘역에 헌화한 뒤 눈물을 닦고 있다. 연합뉴스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부산역전 대화재>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기상청 기상자료개방포털 종관기상관측(ASOS) 자료 중 1953년 11월 부산 날씨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당시 기사(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역사문화대전’
-국제신문 지면 보기
-부산일보 지면 보기
<이승만 대만 방문>
-김영신 ‘장개석과 이승만-세 차례 회동의 유래와 의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당시 기사(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위트컴의 생애>
-국제신문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위트컴 장군’ 시리즈 기사
-오상준 ‘리처드 위트컴: 6.25전쟁 폐허 속에서 핀 인류애’
-미군 신문 ‘Stars and Stripes’ 태평양판 과거 지면 보기
-부산대 ‘부산대학교 70년사’
-이봉범 ‘한미재단(American Korean Foundation), 냉전과 한미 하방연대’
<한국전쟁과 고아>
-김영종 ‘피란수도 부산의 고아원과 고아의 삶’
-박갑룡 ‘전쟁 고아의 아버지 러셀 블레이즈델 리더십’
-소현숙 ‘전쟁고아들이 겪은 전후-1950년대 전쟁고아 실태와 사회적 대책’
-표지영 ‘한국전쟁기 전쟁고아와 부산의 고아원’
<전쟁 당시 부산의 생활상>
-공미희 ‘한국전쟁기 피란민의 부산 정착 과정과 정부정책 고찰’
-서만일 ‘한국전쟁 초기 미군 병참 체계 구축과 부산’
-이임하 ‘피난지 부산에서의 조산사 양성-일신부인병원을 중심으로’
-차철욱·류지석·손은하 ‘한국전쟁 피난민들의 부산 이주와 생활공간’
<유엔군 유해 송환 및 참전용사 안장>
-부산유엔기념공원 홈페이지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 홈페이지
이영창 논설위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