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포 장릉 전경. 궁능유적본부
인조 부(父) 정원군은 선조와 인빈 김씨와의 3남으로 형 두 명은 요절했으며, 광해군의 이복형제이다. 구사맹의 딸인 부인 능성구씨 사이에 능양군, 능원군, 능창군 등 3남을 두었다. 정원군의 이복형 광해군은 조선 최초 후궁 태생의 서자로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아버지 선조에 이어 왕위를 계승했지만 출신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용상(龍床)에 대한 불안감을 늘 가지고 있었다. 비록 망나니같아 왕자의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친형 임해군이 엄연히 살아있고, 여기에 3세지만 인목대비 소생 적자 영창대군까지 살아있기 때문
바다신2 다운로드 이었다. 정통성이 약한 광해군은 즉위 1년 후 친형 임해군 죽이고, 5년 후 8세인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인다. 이에 위기를 감지한 광해의 이복동생 정원군과 정원군의 아들들은 몸을 낮추며 조심한다.
▲ 김포 장릉 전면
바다이야기오리지널 그러나 광해군 7년 1615년 인조의 막내 동생 17세 능창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소명국이란 자의 역모 고변이 있자, 사헌부, 사간원과 홍문관에서는 능창군을 국문할 것을 청했다. 이에 광해군은 능창군을 인정문(仁政門)에서 친히 국문을 한 뒤 옥에 가두었다가 강화 교동도로 유배 보냈다.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고 목에 칼을 채웠으며, 석회수로 밥을 지어
사이다릴게임 먹게 했다. 이에 능창군은 모욕감에 부모에게 고하는 글을 남기고 유배 3개월 만에 자결하였다. 아버지 정원군은 이 일로 홧병을 얻었고, 술로 지새다 40세 나이로 죽었다. 능창군의 편지는 정원군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강화도의 수생(壽生)이라는 자가 사합(沙盒)에 넣어 흙 속에 묻어 두었다가, 1623년 3월 인조반정 이후 인조에게 올려졌다.
온라인야마토게임 인조 아버지 정원군의 묘는 양주군 금촌면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 91로 추정) 능성구씨 처가 선산에 썼다. 광해군이 궁관(宮官)을 보내어 장례 때 제물(祭物)을 보내고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치제(致祭)했다는 기록(광해군일기[정초본] 148권, 광해 12년 1620년 1월 15일 갑오 1번째 기사)이 있다.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 김포 장릉 후면.
정원군은 사망할 때 '군'의 신분이었지만 처갓집 능성구씨 선산에 일반 양민처럼 초라하게 묻혔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아들 능양군이 왕이 되자, 정원대원군으로 높여졌고, 어머니는 연주부부인이 되었고 궁호를 계운궁이라 했다. 계운궁이 1626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김포 현 장릉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육경원(毓慶園)이라 추숭(追崇)했고, 양주 정원대원군의 묘도 흥경원(興慶園)으로 추승했다. 이어 인조는 추봉(追封)을 염두에 두고 흥경원의 천원(遷園)을 서두르나 병자호란으로 중지된다. 치욕적으로 항복한 병자호란의 전후복구에는 안중에 없이 흥경원(興慶園)을 천원하는 일이 변란으로 인하여 정지되었다며 전쟁을 수습을 하기도 전에 천원을 서두른다. 양주 외가 선산에 조성했던 흥경원(興慶園)을 육경원에 천원(遷園)하고 쌍릉으로 조성하였다. 천원 5년 후 인조는 1개월에 걸친 반대 상소, 사직, 면직 처리 등 대신들의 거듭되는 반대와 극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존(追尊)하면서 능호(陵號)를 장릉(章陵)이라 하였다. 남한의 조선왕릉 40기 중 추존 왕릉은 5기인데 아버지를 추존한 왕릉은 정원군의 장릉뿐이다. 나머지 추존 4기는 세조 장자 의경세자의 경릉(敬陵), 영조 장자 효장세자의 영릉(永陵), 영조 아들 사도세자의 융릉(隆陵), 순조 장자 효명세자의 수릉(綏陵) 등으로 4기 모두 세자이다.
▲ 무인석.
장릉이 있는 땅의 세(勢)는 현무봉인 장릉산까지 힘차게 달려왔고, 형(形)은 그치고 기(氣)가 멈추어 기운이 모이는 땅이며, 세래형지(勢來形止)의 조건은 갖추었다. 그리고 산줄기가 금성체의 단정한 현무봉인 장릉산을 만들고 능까지 태식잉육의 절차를 갖추면서 현무수두(玄武垂頭)도 나타난다. 그러나 청룡은 능을 호종하지도 않고, 보호사 구실도 못하며 완연(蜿蜒)하지 않다. 특히 청룡 허리 부분이 왕릉 진입로와 매표소, 주차장을 공사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백호는 정릉저수지까지 능을 보호하면서 낮아졌다가 높아졌다를 반복하나 준거(蹲踞)의 백호로 보기는 어렵다. 안산은 검단신도시 조성으로 인한 안조산인 계양산이 고층아파트로 인해 가려져 있다. 비보책으로 연지를 조성하였지만, 수구 쪽 관쇄(關鎖)가 강하지 못해 산과 물의 음양 조화가 약한 터이다.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한 것은 아들 인조가 반정으로 왕이 되면서 취약한 정통성 확보 차원이었지만, 속내는 광해군으로 인한 집안 고초의 보상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들 잘 만난 덕에 죽은 후 묘비 글자를 바꾸게 된 것이다. 이른바 묘비 글자 팔자(八字)를 '조선국 원종대왕장릉'의 아홉 자로 고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연이 얽혀있고,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추존 왕릉이 된 '세계문화유산' 김포 장릉(章陵)은 검단신도시 조성으로 인한 안․조산인 계양산 경관 훼손 문제로 현재도 또 다른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