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도서관을 여행합니다. 도서관 노동자가 낯선 도시에서 발견한 도서관의 매력, 그 안에 깃든 웃음과 감동, 삶의 온기를 캐리어에 차곡차곡 담았습니다. 책과 사람을 잇는 여행이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기자말>
[이인자 기자]
지난 12월 초 송년회 자리에서 누군가 내게 강원도 '인제 기적의 도서관'을 가볼 것을 권했다. 인생 도서관이라 부를 만큼 멋진 곳이라 했다. 일상적인 공간이라 여겼던 도서관 앞에 '기적'이라는 말이 붙으니 괜히 마음이 움직였다.
'인제'. 인제라고 도서관이 없을 리 없겠지만, 인생 도서관이라 불릴 만큼 인상적인 공간이 있
바다이야기5만 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내린천과 백담사, 3.8선 휴게소, 자작나무 숲. 내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인제의 지도는 그 정도에서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2월 15일, 기적을 만나기 위해 인제로 향했다. 양양고속도로와 44번 국도를 신나게 달렸다. '인제 신남'이라는 교통 표지판을 보자 마음이 더 들썩거렸다. 평일이라 그런지
바다이야기모바일 예상보다 빨리 도서관 주차장에 도착했다.
고대 원형 경기장을 닮은 원통 모양의 도서관
릴게임한국 ▲ 인제기적의도서관 원통 모양의 외관
ⓒ 이인자
내가 상상했던 우뚝 솟은 우람한 건물은 아니었다. 이 말만은 절대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귓속에 오래 남아
골드몽게임 있던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말이 결국 떠올랐다. 도서관 건물이 진짜 원통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권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로마제국의 고대 원형 경기장을 연상시키는 숭고함이 느껴졌다. 공공도서관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만큼, 이곳에 들어서려면 미리 예매한 티켓을 내밀어야 할 것만 같았
바다이야기무료 다.
원통 안으로 들어서자 상상 이상의 공간이 펼쳐졌다. 웅장한 층고, 원 안을 가득 채운 마법 같은 책들의 정렬, 자작나무처럼 곧게 뻗은 흰 기둥들, 인공조명이 아니라 은은하게 쏟아지는 자연 채광. 도서관 안의 모든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 도서관 내부 웅장함에 압도되다
ⓒ 이인자
'와.'
소리 없는 함성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공간이 주는 경이로움 앞에서 탄성은 통제불능 상태가 되어버렸다. 자석에 이끌리듯 발길 닿는 대로 동선을 정했다. 먼저 1층에서 계단을 따라 몇 칸 아래로 내려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무대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하모니카만 불어도, 순식간에 콘서트장으로 변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이 자리에서는 주민들을 위한 음악회가 종종 열린다고 했다.
'어디에 앉지?'
노트북을 들고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VIP석처럼 느껴졌다. 짐을 풀고 본격적인 공간 탐색에 나섰다. 2층 계단 끝에는 종합자료실이 놓여 있었고, 원의 둘레를 따라 음악, 미술, EBS 콘텐츠를 활용할 수 있는 공간들이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모두 이 지역 주민을 위한 공간이었다.
조금주 저자의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도서관들>을 읽은 적이 있다. 세계 각국의 이색 도서관을 소개한 책이다. 좋은 도서관 하나가 쇠락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했던 문장이 생각났다. 인제가 쇠락한 지역이라는 뜻은 아니다. 천혜의 자연 환경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축복받은 곳이다. 다만 이런 도서관의 존재가 지역 주민들의 문화예술과 지식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고, 일상에 새로운 결을 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 오면 언제나 운명적인 책과 조우하게 된다. 이곳에서 내가 집어 든 책은 김미옥 작가의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였다. 얼마 전 <미오기전>을 읽고 활활 끓는 작가의 삶과 문체에 마음이 붙들려 있던 터였다. 청구기호 '818-김 38ㄱ'. 책을 찾아 자리에 앉았는데, 옆자리에 짧은 머리를 하고 각을 세운 채 공부하는 청년이 앉아 있었다.
사복을 입은 군인처럼 보였다. 공부하는 모습에서 늠름함이 느껴지다니, 이것 역시 인제라는 장소가 만들어낸 풍경이 아닐까 싶었다. 군인 아저씨에서 군인 오빠로 군인 동기와 조카를 지나 이제는 군인 아들(실제로는 딸만 둘이지만)을 둘 법한 나이에 이르렀다. 옛 시절에 써 내려갔던 위문편지들이 궁금해졌다. 그중에는 인제의 어느 부대로 향했던 편지도 있었을 것이다.
선물처럼 숨겨진 공간
▲ 콘서트장 같은 무대 음악회가 열리는 도서관
ⓒ 이인자
2층 종합자료실 벽면 쪽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려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벽에 남은 낙서였다. OO중 3학년, 반 이름 초성 퀴즈. 'ㄱㅎㅈ, ㄱㅁㅈ, ㅂㅈㅇ, ㅁㄱㅊ... ' 숭고한 원형 경기장처럼 느껴지던 도서관이 그 순간만큼은 동네 분식점처럼 친근해졌다. ㄱㅎㅈ은 김해준일까, 김효진일까. 아니지, 김 씨가 아닐 수도 있지. 감씨일까, 기씨일까. 나도 모르게 초성 놀이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 역시 공공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순간 멈칫했다.
낙서를 막아야 하는 사람과 남기고 싶은 사람 사이의 눈치 싸움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주는 긴장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내가 근무하는 도서관 역시 인근 중학교의 시험 기간만 되면 조용한 전투 상태에 들어간다. 떠들려는 쪽과 말려야 하는 쪽이 서로의 기척을 살피며 하루를 버틴다. 그러니 이 낙서도 치열한 눈치 싸움 끝에 남겨진 것일지 모른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사실은 한 시간 전부터 함께 온 남편이 배가 고프다며 계속 눈치를 주고 있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만큼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아까웠다.
짐을 챙겨 나가려는데, 선물처럼 숨겨진 공간 하나를 발견했다. 문을 여는 순간, 디지털 미디어 아트가 아름다운 빛으로 쏟아졌다. 설악은 자부심, 자작은 속삭임, 명화는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인제 자작나무숲을 아직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이렇게 빛으로 먼저 만날 수 있었으니 뜻밖의 행운이었다. 이곳은 공공도서관 최초의 몰입형 미디어아트실이라고 했다. 책과 공간을 넘어, 미래적인 감각까지 품고 있는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 미디어아트실 환상의 빛의 향연
ⓒ 이인자
기적의 도서관에서 기적을 만나다.
전국에 '기적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서관은 현재 18곳이다. 인제 기적의 도서관은 그중 17번째다. 2023년 개관 이후 이미 십수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기적이라 부르지만, 평범한 하루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 말은 종종 멀게 느껴진다. 내 안의 불안한 정서 탓인지, 기적이라는 말 앞에는 언제나 큰 불행이 먼저 놓여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삶에게, 기적은 지나치게 극적인 단어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인제 기적의 도서관을 다녀온 뒤,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조용한 자연의 도시에 새로운 도서관 하나가 세워졌고, 그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게 되었다. 인제 여행에서 도서관에 가는 일은 더 이상 비상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상식적인 동선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사는 누군가의 인생이 도서관을 통해 새로운 동선을 꿈꾸게 되었다면, 그것 역시 기적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과의 만남은 역사를 만들고, 책과의 만남은 기적을 만든다.'
인제 기적의 도서관 한쪽 벽에서 만난 문장이었다. 책이 가진 기적, 그리고 그 책을 품고 있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기적이 함께 느껴졌다.
덧붙이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