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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protected]김하중 전 통일부장관은 격동의 시기 북미담당관실서 일하며 경색된 한미 관계 현장을 목격했다. 사진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9년 국회 출석해 재임 중 발생한 각종 비리와 의혹, 5·18민주화운동 관련 경위를 증언하는 모습. 국민일보DB
귀국해 북미담당관실(과장 소병용)에 출근하니 사무실 분위기가 상당히 긴장된 상태였다. 1976년 10월 ‘워싱턴 포스트’ 기사로 시작된 코리아게이트, 이른바 ‘박동선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 의회엔 한·미 관계 조사권을 위임받은 ‘프레이저 소위원회’가 구성됐다.
뽀빠이릴게임 이 프레이저 소위원회의 최종보고서가 11월 발표 예정이라 정부는 보고서 내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자연히 미국을 담당하는 북미담당관실 분위기도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정부의 관심이 집중됐던 미국 의회를 담당했다. 이 때문에 언론에서 미국 국회의원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국장이나 청와대 비서실 관계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사아다쿨 대개 해당 의원이 어떤 사람인지 빨리 알아내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각종 자료를 찾아서 보고하려니 여간 복잡하고 힘든 게 아니었다. 나는 미국 국회의원 존안 자료(인사 관련 자료) 카드를 만들기로 했다.
몇 주에 걸쳐 주말에 사무실로 출근해 미국 의회와 정부의 각종 자료, 주미대사관 보고나 그동안 본부에서 작성한 각종
릴짱릴게임 자료를 취합해 상원의원 100명과 하원의원 435명에 대한 카드를 작성했다. 또 이 카드를 담을 나무 상자에 잠금장치를 부착한 뒤 전화기 옆에 뒀다. 전화가 오면 상자를 열면서 동시에 수화기를 들었고 상대방이 미국 국회의원의 이름을 말하면 해당 인사의 카드를 뽑았다. 뒤이어 해당 인사에 대해 무엇을 알아보라고 하면 나는 그 카드를 보며 즉시 설명했다. 이전
바다이야기모바일 까지는 항상 “조사해서 보고하겠다”고 했는데 바로 대답을 내놓으니 놀라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유종하 국장(훗날 외무부장관)이 직접 사무실로 와서 그 상자를 보고 갔다. 지금이야 그런 자료는 컴퓨터로 쉽게 검색할 수 있다. 당시는 내가 컴퓨터 역할을 한 것이니 놀랐던 것 같다.
79년 1월 18일 오후, 청와대 외교특보실에서 갑자기 나를
무료릴게임 찾았다. 함병춘 대통령 외교특보는 내게 “박동진 장관에게 이야기해 김 사무관을 내 비서로 쓰기로 했으니, 내일부터 와서 근무하라”고 했다. 나는 외무부로 돌아와 국장과 과장에게 이를 보고했다. 잠시 후 국장은 “함병춘 특보에게 김 사무관을 안 보내기로 했으니 계속 일을 하라”고 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나는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당시 나는 3명의 고시 동기와 함께 승진했는데 이들과 달리 내 승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해 7월 초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끝난 다음 나는 당시 신설된 재외공관 담당관실 차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사과는 “‘재외공관 예산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김 서기관을 담당관실로 보내라’는 상부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한 인사”라고 설명했다. 나는 8개월 동안 김창근 과장을 비롯한 직원들과 함께 열심히 노력해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뒀다. 80년도 예산 배정 작업을 끝낸 이후 기획관리실장은 내게 “그동안 수고했다. 이곳에 더는 있을 필요가 없으니 북미담당관실로 돌아가라”고 했다. 당시 북미담당관실은 외무부 내 대다수 젊은 직원이 선망하는 부서였다. 이 때문에 다른 과로 갔다가 10개월 만에 북미담당관실로 돌아간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80년 작성한 ‘전두환 축출 계획’이 담긴 문건들. 백악관 명칭 아래 문서 작성 시점(위)과 전 전 대통령 축출 계획이 담긴 ‘가능한 정책 옵션들: 남한’(아래) 등의 내용이 실려있다. 국민일보DB
북미담당관실로 돌아간 나는 차석으로서 미국 행정부를 담당했다. 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12·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이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한 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해 정권을 장악한 때였다. 8월 16일 사임한 최규하 대통령의 뒤를 이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전두환 씨가 9월 1일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 정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흘렀다. 그 중간에서 외무부는 어려운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북미담당관실은 말 그대로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일했다.
북미담당관실로 돌아간 지 5개월 후 나는 다시 외환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몇 달 후 신두병 총무과장(훗날 주이탈리아 대사)이 떠나고 새로이 고(故) 김정기 과장(훗날 주사우디 대사)이 부임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나는 될 수 있으면 봄에 해외로 나가길 희망했다. 한데 과장이 ‘해외로 나가지 말고 인사계장을 맡아 달라’고 몇 번을 설득해 결국은 남기로 했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청와대는 공무원 기강을 세우기 위해 공정한 인사를 하라고 각 부서에 강력히 지시했다. 인사위원회가 열리는 날이면 밤을 새우면서도 결론을 내지 못할 때가 참 많았다. 이때 인사 주무로 나를 도왔던 박병연 사무관(훗날 주피지 대사)과 고 최일송 사무관(훗날 주루마니아 대사), 김원수 사무관(훗날 유엔사무차장) 및 양봉렬 사무관(훗날 주말레이시아 대사)과 야근도 많이 하고 밤도 자주 샜던 게 기억에 남는다.
어느덧 1년이 흘러 해외로 나갈 때가 되었다. ‘험지로 가겠다’고 생각했던 참에 ‘인도대사관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과장 권유에 따라 인도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고 주인도대사관 일등서기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미국 뉴욕에서 돌아와 3년 반 동안 5번이나 자리를 옮겼다. 야근을 밥 먹듯 많이 했던 나날이었지만 승진도 빨리하고 보람이 많았다. 더욱이 아들 하나를 더 얻고 인도를 갈 수 있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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